[나병문 칼럼] 디지털 시장 규제로 미국 IT기업을 차별하는 국가에 대해 관세로 보복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경고가 한국을 겨냥한 것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미국의 정치 전문 일간지 폴리티코(Politico)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이 한국 정부에 대해 디지털 규제 법안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하라면서, 그런 내용이 포함된 공동성명에 서명하라고 압박했으나 한국 정부가 이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미 무역대표부(USTR)는 줄기차게 한국을 향하여 디지털 장벽을 해소해 달라고 요구해왔다. 그들이 지목하는 세부적인 장벽의 내용은 망 사용료 부과, ‘온라인플랫폼법’ 입법, 정밀 지도 데이터 국외 반출 제한 등이다. 미국 IT업계가 이 같은 요구사항을 들고 미국 정부에 줄기차게 로비(lobby) 중이라는 이야기도 공공연한 사실이다. 가뜩이나 관세 문제로 어수선한 차에 또 하나의 난제가 우리에게 던져진 형국이다.
그와 관련하여 새로 나온 트럼프의 반응이 무시무시하다. 그는 25일 소셜미디어에 “디지털 세금, 디지털 서비스 법안, 디지털 시장 규제는 모두 미국 기술에 해를 입히거나 차별하기 위해 설계됐다. 이들은 중국 기술 기업들에는 완전한 면제를 주고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디지털 세금·법안·규칙·규제를 도입한 모든 국가에 경고한다.”라며 포문을 열었다.
그는 또 “이런 차별적 조치가 철회되지 않는 한 해당 국가의 대미 수출품에 상당한 추가 관세를 부과하고 미국 기술과 반도체에 대한 수출 제한을 도입할 것이다.”라며 한껏 공세의 수위를 높였다. 비록 한국을 직접 지목하진 않았지만, 사실상 한국을 겨냥한 셈이다. 이처럼 미국 정부가 한국의 디지털 규제 완화를 강하게 압박함에 따라 우리 정부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한국이 처한 도전과 과제
한국은 그동안 디지털세, 발신자 부담제(SPP), 지도 데이터 규제 등 굵직한 정책들을 준비해왔다. 공정 경쟁과 산업 생태계의 균형을 위해 글로벌 플랫폼이 국내에서 거둬들이는 막대한 수익에 합당한 세금을 매기고, 트래픽을 과도하게 유발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사회적 비용을 분담시키며, 안보 차원에서 지도 데이터의 유출을 제한하려는 의도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대외적으로 역풍을 불러올 우려가 있다. 특히 미국 같은 나라는 한국이 디지털세와 발신자 부담제를 통해 사실상 자국 기업에 대한 ‘차별적 장벽’을 세우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한국의 의도와 다르게 양국 간의 갈등으로 번질 수 있으며, 곧바로 추가 관세 부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파장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추진 중인 디지털 정책을 전면 재검토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이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글로벌 디지털 규제 전쟁의 현재 구도는 뚜렷하다. 미국은 ‘규제 최소화’를 앞세우며 자국 기업을 보호하는 한편, 자유로운 디지털 무역을 국제 표준으로 만들려 한다. 반면 유럽연합(EU)은 개인정보 보호법(GDPR)과 ‘디지털시장법(DMA)’을 통해 강력한 규제를 시행함으로써 플랫폼 기업의 영향력을 통제하고자 한다. 일본·싱가포르 등 아시아 주요국은 제한적 규제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실험적 허용을 병행하는 ‘혼합형 모델’을 택하고 있다.
한국은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양새다. 규제를 강화하면 미국의 강력한 반발을 사게 되고, 규제를 완화하면 국내 소비자 보호와 산업의 공정성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어느 한쪽으로 기울더라도 리스크를 피할 수 없다. 이렇듯 양자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기 어려운 ‘중간자의 딜레마’가 한국의 가장 큰 구조적 취약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한국이 준비한 정책을 그대로 밀고 나간다면 미국의 즉각적인 보복을 받게 될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난관을 타개할 묘안(妙案)은 없는가?
지금 지구촌이 돌아가는 형세는 얼마 전까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급변했다. 트럼프 2기를 맞아서 거의 매일같이 터져 나오는 미국의 메가톤급 요구 앞에서 세계가 전전긍긍하고 있다. 물론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중요한 건, 이럴 때일수록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책의 우선순위를 국익에 두되 자칫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다간 거센 보복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냉정한 판단을 거쳐 최적의 방안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가 문제의 핵심이다. ‘규제와 협력의 균형’이 답이 될 수 있다. 국내 산업과 소비자를 보호할 최소한의 규제를 지켜내면서 국제 질서와 충돌하지 않도록 조율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한국식 규제 모델’만을 고집한다면, 장기적으로 디지털 경제의 미래를 스스로 가로막는 꼴이 될 수 있다. 국제적 합의와 현실적 한계를 고려하지 않으면, 자칫 산업 경쟁력 위축과 외교적 고립이라는 이중의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합리적인 규제와 협력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를 압박하는 국제 질서와 충돌하지 않을 묘안이 시급하다. 정책적 대안은 명확하다. 첫째, OECD나 G20 같은 다자 협의체와 보조를 맞춰야 한다. 둘째, 일괄적인 규제도입보다 단계적 접근으로 산업이 적응할 시간을 줘야 한다. 셋째, 네이버·카카오 같은 국내 기업뿐 아니라 구글·애플 등의 글로벌 기업과의 협력 채널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
한미 간 협상 결과로 이미 관세 압력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번 사태까지 겹친다면 한국 경제의 앞날은 더욱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문자 그대로 설상가상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우왕좌왕이 아니라 즉각적이고 현명한 대책이다. 정부와 국회, 그리고 관련 기업들은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당장 머리를 맞대고 코앞으로 다가온 거대한 쓰나미를 막아낼 실질적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만이 백척간두에 선 대한민국 경제를 살릴 수 있는 길이다.
저자 소개
나병문(rabmna1958@naver.com)
-전국퇴직금융인협회 금융시장연구원 연구위원
-SN경영연구원장
-경영학박사, 전 우리은행 지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