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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엔 석유가 세계질서의 목줄, 앞으론 전기가 문명의 혈류
과거엔 석유가 세계질서의 목줄, 앞으론 전기가 문명의 혈류
  • 윤영호
  • 승인 2026.07.11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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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상 에너지 병목지점에 패권의 열쇠가 있다...석유시대는 저물고, 전기시대가 열린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력을 국가 경쟁력의 핵심 자산으로 바라보는 전략적 사고의 전환

[윤영호 칼럼] 역사는 언제나 가장 부족한 자원을 중심으로 권력이 이동해 왔다. 석기시대가 돌이 부족해서 끝난 것이 아니듯, 석유 시대 역시 석유가 고갈되어 막을 내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명을 움직이는 새로운 병목이 등장할 때 패권은 조용히 이동한다.

지난 100년 동안 세계 질서를 움직인 것은 석유였다. 석유를 지배한 국가가 세계 경제와 군사, 외교를 주도했다. 그러나 이제 인공지능(AI)이 새로운 산업혁명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패권의 무게추는 석유에서 전기로 이동하고 있다. '페트로스테이트(Petro-state)'의 시대가 저물고 '일렉트로스테이트(Electro-state)'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AI 산업의 병목은 이미 여러 차례 이동했다. 생성형 AI 초기에는 CPU에서 GPU로, 추론형 AI 시대에는 다시 HBM(고대역폭메모리)으로 옮겨갔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새로운 전성기를 맞는 것도 이러한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거대한 병목이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전력이다.

반도체는 공장을 증설하면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 그러나 발전소와 송전망은 그렇지 않다. 착공에서 완공까지 수년이 걸리고, 주민 수용성과 환경 문제, 정치적 갈등까지 넘어야 한다. 기술보다 시간이 부족하고, 돈보다 사회적 합의가 더 어려운 영역이다. AI 시대의 궁극적인 희소 자원은 결국 반도체를 넘어 전기가 될 것이다.

AI의 두뇌를 만드는 공장은 동시에 막대한 전기를 소비하는 시설

AI 데이터센터는 이제 '전기 먹는 공룡'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초대형 데이터센터 하나가 중소 국가의 연간 전력 소비량에 맞먹는 전기를 사용한다. 2030년 미국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는 한국 전체 연간 발전량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국내에서 1년 동안 만들어내는 총전력량(약 595TWh)이 향후 미국이 새로 짓는 대형 AI 데이터 센터들이 먹어 치울 전력 총량과 맞먹는 수준이라는 점에서 인공지능의 전력 폭식이 얼마나 엄청난 규모인지 짐작할 수 있다.

반도체 공장 역시 마찬가지다. AI의 두뇌를 만드는 공장은 동시에 막대한 전기를 소비하는 시설이다. 국내 대표 반도체 기업이 연간 전기요금으로만 약 5조 원을 부담하는 현실은 전력이 곧 제조 경쟁력임을 보여준다.

"AI의 두뇌는 반도체이고, 그 심장은 전기다." 심장이 멈추면 아무리 뛰어난 두뇌도 움직일 수 없다.

이 때문에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이미 전력 확보 전쟁에 돌입했다. 발전소 인근에 데이터센터를 짓고, 폐쇄 예정이던 원전을 다시 가동하며, 발전소 자체를 장기 계약으로 확보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이제 빅테크 기업의 경쟁 상대는 반도체 기업이 아니라 전력회사라는 말까지 나온다.

전기의 특성은 더욱 까다롭다. 석유처럼 저장해 둘 수도 없다. 생산과 소비가 매 순간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 균형이 무너지면 대규모 정전이라는 사회적 재난으로 이어진다.

AI 반도체 (PG) 연합뉴스

전기를 실어 나를 송전망이 없다면 발전소는 '거대한 섬'에 불과

재생에너지 확대 역시 반드시 가야 할 길이지만, 태양광과 풍력은 날씨에 따라 출력이 크게 달라진다. AI 산업처럼 24시간 안정적인 전력을 요구하는 분야에서는 기저전원을 대신하기 어렵다. 결국 원전, 가스발전, 재생에너지를 적절히 조합하는 에너지 믹스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게 된다.

그러나 발전소만 짓는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전기를 실어 나를 송전망이 없다면 발전소는 거대한 섬에 불과하다.

한국은 유럽처럼 주변 국가와 전력망을 연결할 수도 없는 '전력의 섬'이다. 발전소는 동해안과 남해안에 집중돼 있지만 소비는 수도권에 몰려 있다. 송전망이 국가 혈관이라면 지금 우리의 혈관은 곳곳에서 막혀 있는 셈이다.

필자는 동해안 지역에서 수년 째 이어지는 송전선로 갈등을 직접 지켜봤다. 국가적으로는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지만, 주민 입장에서는 삶의 터전 한복판을 거대한 송전탑이 지나가는 일이다. 공익과 사익이 충돌하는 대표적 사례다. 에너지 정책은 발전 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회적 신뢰와 합의가 함께 구축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한국에는 뜻밖의 기회가 있다.

세계 각국이 전력 부족과 지정학적 위험에 직면하면서 안정적인 전력 공급 능력을 갖춘 국가가 새로운 투자처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건설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짧은 공기와 높은 품질 경쟁력을 동시에 갖춘 몇 안 되는 나라다. 여기에 소형모듈원전(SMR) 기술과 발전기·변압기·초고압 케이블 등 전력 인프라 산업까지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전력 확보는 이제 국가 안보이자 산업 전략이며 미래 성장의 기반

AI 시대는 반도체만 수출하는 나라보다 전력을 설계하고 공급할 수 있는 나라가 더 큰 가치를 창출할 가능성이 크다. 전력은 더 이상 공공요금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안보이자 산업 전략이며 미래 성장의 기반이다.

물론 장밋빛 전망만으로는 부족하다. 데이터센터 유치 경쟁이 지역 주민의 전기요금 인상으로 이어져서도 안 되고, 산업용 전력 확대가 국민 생활의 불편과 정전으로 귀결되어서도 안 된다. 국가 전체의 전력 수급과 송전망, 산업단지 입지, 에너지 믹스를 촘촘하게 시뮬레이션하는 정교한 국가 전략이 선행되어야 한다.

나폴레옹은 "군대는 배 위로 행군한다"고 말했다. 오늘날 AI 역시 전력 위에서만 움직인다. 아무리 뛰어난 알고리즘도 전기가 끊기면 단 한 줄의 추론도 이어갈 수 없다.

패권은 언제나 병목에서 탄생했다. 과거에는 석유가 세계 질서의 목줄이었다면, 앞으로는 전기가 문명의 혈류가 될 것이다. AI 시대 최종 승자는 가장 뛰어난 반도체를 만드는 나라만으로 부족하다. 그와 더불어 가장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다가오는 일렉트로스테이트 시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발전소를 짓는 일 뿐만 아니라 전력을 국가 경쟁력의 핵심 자산으로 바라보는 전략적 사고의 전환이다. 미래의 패권은 이미 에너지 병목지점에서 조용히 방향을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필자 소개

윤영호<yhy321321@gmail.com>

(사) 서울이코노미포럼 공동대표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더뉴스24 주필

전 HCN지속협 대표회장

전 ㈜ 한림MS 기획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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