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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자의 욘사마, 넷플릭스의 NHK : 주객이 전도된 한류의 내일
긴자의 욘사마, 넷플릭스의 NHK : 주객이 전도된 한류의 내일
  • 민경중
  • 승인 2026.06.02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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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도쿄의 밤과 2026년 전도된 풍경...NHK는 '공공성'과 '수익성'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글로벌 유통에서 찾기 시작
우리나라의 컨텐츠는 언제까지 국내용에 머물 것인가. 독자 플랫폼을 고수할 것인가, 글로벌 플랫폼과 손을 잡을 것인가

[민경중 칼럼] 2004년 도쿄의 호텔 방이었습니다. 브라운관 TV를 켜자 낯익은 얼굴이 흘러나왔습니다. '욘사마' 배용준의 부드러운 미소였습니다. 일본 열도를 흔든 《겨울연가》의 서막이었습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한국의 잡채를 '한국풍 당면 볶음'이라 소개하며 신기해했습니다. 그것이 한류의 본격적인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거대한 일본 문화 시장의 문을 두드리는 수줍은 도전자였습니다.

22년이 지난 2026년의 도쿄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일본 내 한국의 위상은 상상 이상으로 높아졌습니다. 젊은 층 사이에서는 한국어 열풍이 붑니다. 한국 음식과 패션은 도쿄의 가장 핫한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공항 지하철 카드를 교환하는 곳에서부터 친절한 한국어가 들립니다. 식당에 들어서면 현지 직원이 먼저 한국어로 반갑게 인사를 건냅니다. 한국인으로서 묘한 자부심이 차오르는 순간입니다.

시선들, 향수와 냉소

길을 걷다 뉴오타니 호텔 정문에 서 있던  나이 지긋한 일본인 경비원에게 다가갔습니다. 간단한 역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턱짓을 했습니다. "안내데스크에나 물어보라"는 차가운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그의 굳은 표정에서 묘한 공기가 읽혔습니다. 버블경제 이전, 세계를 호령하던 호황기 일본에 대한 향수였을까요. 혹은 급격히 치고 올라온 한국에 대한 무의식적인 경계심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긴자 거리의 풍경은 변했어도, 보이지 않는 벽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지금의 한류와 K-컨텐츠는 단연 세계 최고입니다. 그러나 이 눈부신 취기 속에서 서늘한 뉴스가 날아들었습니다. 글로벌 OTT 공룡 넷플릭스가 일본 국영방송 NHK와 손을 잡았다는 소식입니다. 일본 시장 확대를 노리는 넷플릭스는 대하드라마 《군사 간베에 (軍師官兵衛)》, 아침 시리즈 《만푸쿠(まんぷく)》 등 2027년까지 총 19편의 NHK 드라마를 전 세계에 내놓기로 계약했습니다.

2004년 호텔 방안에서는 TV를 틀면 겨울연가와 배용준이 나오는 시기였다.  긴자 거리를 뒤덮은 겨울연가 포스터와 DVD, 주제가 음반들.

서늘한 경고음, 그리고 NHK의 결단

2014년 방영된 《군사 간베에》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극으로 뛰어난 책략가 구로다 간베에가 일본 통일 과정에서 활약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만푸쿠(まんぷく)》는 세계 최초 인스턴트 라면을 만든 모모푸쿠 안도 (Momofuku Ando) 부부의 실화를 모티브로 제작, 전후 일본의 가난과 창업 도전을 그린 감동 드라마입니다. 넷플릭스는 그것도 모자라 일본 TV의 간판 버라이어티 쇼까지 인수하며 예능 생태계까지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넷플릭스가 왜 한국 대신 일본의 공영방송과 이토록 밀착할까요. 일차적으로는 한국 컨텐츠 시장의 제작비와 배우 몸값이 지나치게 폭등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질은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습니다. 이번 NHK의 행보는 단순히 자사 드라마를 글로벌 플랫폼에 유통하는 차원을 넘어, 공영방송의 패러다임 자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실험입니다.

NHK가 넷플릭스에 공급하기로 한 19편 중 일부.

NHK가 우리에게 던지는 3가지 질문

국민이 내는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의 컨텐츠는 과연 누구의 것일까요. NHK는 이 오랜 질문에 파격을 던졌습니다. "우리 플랫폼(NHK Plus)으로 오라"고 고집하는 대신, "3억 명의 시청자가 있는 넷플릭스로 가겠다"를 선택한 것입니다. 이제 공영방송은 '국민을 위한 방송'에서 '세계로 유통되는 문화 자산'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제작비는 치솟고, 젊은 층은 TV를 보지 않으며, 수신료 납부율은 떨어지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NHK는 '공공성'과 '수익성'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글로벌 유통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의 가치사슬이 방송사 → 시청자였다면, 이제는 제작자 → 플랫폼 → 알고리즘 → 시청자로 바뀌었습니다. 넷플릭스나 유튜브 같은 플랫폼이 무엇을 보게 할지 결정하는 거대한 관문(Gatekeeper)이 된 시대, NHK는 그 생태계를 인정하고 '호랑이 굴'로 들어간 셈입니다.

2004년 한국의 잡채를 소개하는 한 일본 방송사릐 정보프로그램. 한류의 시작을 알리는 컨텐츠들이 쏟아져 나왔다.

길을 잃은 한국 지상파, 그리고 용산

이 낯선 실험은 한국의 공영방송(KBS·EBS)에도 뼈아픈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컨텐츠는 언제까지 국내용에 머물 것인가. 독자 플랫폼을 고수할 것인가, 글로벌 플랫폼과 손을 잡을 것인가. AI가 추천을 지배하는 시대에 공영방송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위기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국내 지상파 중 SBS는 발 빠르게 넷플릭스에 컨텐츠를 공급하며 생존법을 찾고 있습니다. 반면 대한민국 컨텐츠의 버팀목이어야 할 KBS와 MBC 등은 거대한 플랫폼 격변기 속에서 여전히 방향성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마치 과거 아키하바라를 모델 삼아 자라났으나 생태계를 지키지 못하고 공동화되어 버린 우리의 '용산전자상가'처럼 말입니다. 독점적 지위에 취해 자멸했던 과거 일본 가전업계의 전철을, 이제는 우리의 K-컨텐츠가 밟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가슴을 짓누릅니다.

같은 장소, 다른 사진

플랫폼 전환의 시대

결국 NHK 사례의 본질은 하나입니다. 이제는 단순히 '좋은 컨텐츠를 만드는 시대'가 아니라, '좋은 컨텐츠를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유통할 것인가의 시대'라는 점입니다.

이는 비단 방송뿐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학 강의도, 언론도, 출판도, 심지어 기업 브랜딩까지 시청자와 독자가 있는 플랫폼으로 직접 찾아가지 않으면 도태되는 거대한 패러다임 시프트입니다.

2004년 욘사마의 미소로 시작된 기적 같은 한류의 역사. 도쿄 거리의 한국어 인사에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플랫폼이라는 거대한 관문 앞에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다음 미래는 과연 어디에 있을지, 생각이 깊어지는 순간입니다.

<사진=필자 민경중 교수 제공>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필자 소개>

민경중/nocutceo@naver.com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언어문화학부 초빙교수

한국정책학회 전략부회장

㈜코아스 상임고문

제주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14년 미래창조과학부장관 표창

2004년 제24회 한국방송대상 앵커상

2018.02~2021.10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무총장

2010~2012.12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 심사위원회 위원장

1996~1998 CBS 베이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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