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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 성장 신화, 재점검할 때다
‘빨리빨리’ 성장 신화, 재점검할 때다
  • 나병문
  • 승인 2025.12.02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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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 지향 문화는 우리 국민의 일상 곳곳에...국가 위상과 국민 수준에 걸맞은 행동 문화 정립해야

[나병문 칼럼]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최근 국제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러·우 전쟁 이후 각국의 군비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한국의 방산기업은 정해진 기한을 반드시 지킨다.”라는 인식이 확산한 덕분이다. 방산 선진국들이 기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 기업의 ‘납기 준수’가 강점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 같은 현상은 무기 수출에 국한하지 않는다. 제조업을 비롯한 산업 분야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한국 특유의 빠른 속도 문화가 배어있다.

1970~80년대 대한민국의 성장 속도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그 시기에 한국은 매년 두 자릿수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영세한 영농국가이던 한국이 공업화의 길로 접어들게 되면서 전국이 건설 현장으로 변모했다. 특히 고속도로 건설, 선박 건조 등에서 놀라운 속도를 보여주었다. 그 경이로운 성장의 배경에는 산업 역군들의 헌신과 ‘빨리빨리’ 문화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속도 중심 문화는 우리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깊이 뿌리를 내렸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였던 우리는 오랫동안 ‘은근과 끈기의 민족’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6.25 전쟁을 겪은 후, 무너진 산업 기반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앞만 보고 죽기 살기로 일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전대미문의 고속 성장을 이루어냈고, 속도가 미덕인 사회가 되었다. 스피드가 중시되던 그 시기에 빠름은 능력 자체였고, 느림은 무능이었다.

속도 지향 문화는 선진국이 된 지금도 우리 국민의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주위를 돌아보라.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기다리는 걸 참지 못한다. 무엇이 됐든 빨리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가차없이 압박을 가한다. 조급증이 하나의 문화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이다.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스피드를 앞세운 마케팅에 주력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실제로 쿠팡, 컬리, SSG 등은 기존의 새벽 배송에 더해, 신속 배송 서비스를 더 확대하려는 전략을 추진 중이다.

속도 신화의 후유증

휴전 직후엔 빠른 속도가 생존 전략이었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한눈을 팔거나 게으름을 피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부작용은 무시하고 마냥 질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쌓여온 문제들이 지금 와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출산율 최하위를 기록 중이다. 그 외에도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갈등이 나타나는 중이다. 고속 성장의 대가를 요구하는 청구서인 셈이다.

과속 문화는 이미 개인의 삶에 깊은 균열을 냈다. 힘들어도 쉬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멈추면 뒤처진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부작용이 사회 전반에 걸쳐 노정(露呈)되고 있다. 기술 발전은 쉬는 법이 없지만, 인간 내면의 상처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계와 사람의 차이, 그들 사이의 간극이 불안을 야기하고 스트레스를 증폭시킨다.

그런 판에 새로운 형태의 속도 경쟁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제는 웬만한 의사소통은 SNS를 이용하고, 정보는 인공지능에 의존한다. 기업 경영은 초단기 의사결정을 요구받고, 정부 정책도 즉각적인 여론의 반응에 영향을 받는다. 검토와 숙성의 과정이 필요한 각종 법안이나 국가 정책에 대해서도 신속한 결과를 요구하는 이해당사자들의 압력이 분출하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속도 경쟁은 이전에 추구했던 ‘빠름’과는 성격이 다르다.

과거와 전혀 다른 세상이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고 있다. 모든 분야에서 불확실성이 커진 판국에 속도 위주의 전략은 수명을 다했다. 한때 국가 성장을 이끈 동력이었던 ‘빨리빨리’ 문화가 더는 유용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정교하고 유연한 대응 능력이다. 그것 없이는 갈수록 현란하게 변화하는 상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행동 문화 정립할 때

대한민국은 이미 선진국이다. 가발이나 저가 의류제품을 팔면서, ‘백억 불 수출’을 외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국가가 된 것이다. 실제로 2024년 기준 우리나라 수출 상위 5대 품목을 살펴보면 반도체, 자동차, 석유화학 제품, 선박, 무선통신기기 순이다. 그 한 가지만 보더라도 국내 산업이 얼마나 고도화되었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이 하던 일들을 기계가 대신하는 첨단 기술 시대에 ‘쉬지 말고 달려라.’라는 말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는가.

일부러 속도를 늦추자는 얘기가 아니다. 시간적 낭비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업무를 효율적으로 추진하는 건 지금도 유용하다. 하지만 개발도상국이던 시절에 성장을 명분으로 애써 무시했던 문제들을 선진국 된 지금에서 와서도 모른 체할 수는 없다. 고속 성장의 과정에서 나타났던 여러 부작용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것은 우선순위에 관한 문제이다.

미래의 경쟁력은 속도를 높이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속도를 통제하고 설계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인공지능 기반의 사회를 맞아 속도 자체는 AI 알고리즘에 맡기고 인간은 그것을 제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런 사회에선 개인의 ‘속도 조절 능력’이 새로운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다. 국가는 고도의 선진 사회 시스템을 지탱할 종합적인 ‘조율 메커니즘’을 갖추어야 한다. 속도의 개념과 통제 방식을 재설계함으로써 국격을 높여야 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속도를 앞세워 성장해온 대한민국은 대전환기(大轉換期)를 맞았다. 확연히 달라진 국가 위상과 국민 수준에 걸맞은 행동 문화를 정립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때 우리의 상징과도 같았던 ‘빨리빨리’의 후유증을 제대로 극복해야 한다. 그와 더불어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중시하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지난 시기에 배고픔을 참아내며 피땀 흘린 선배들에 대한 진정한 보답이 될 것이다.

저자 소개

나병문(rabmna1958@naver.com)

-전국퇴직금융인협회 금융시장연구원 연구위원

-SN경영연구원장

-경영학박사, 전 우리은행 지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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