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증시의 '혼돈'...카지노는 승자의 주머니를 채우지만, 자본시장은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여야
[윤영호 칼럼] 주식시장은 미래를 사고파는 곳이다. 기업의 현재 실적만이 아니라 미래의 성장 가능성을 평가해 자본을 필요한 곳으로 보내는 것이 본래 기능이다. 혁신 기업에는 돈을 몰아주고 경쟁력을 잃은 기업에서는 자본을 거둬들이는 냉정한 선택이 자본주의를 발전시켜왔다.
그런데 지금 주식시장이 본래의 사명을 잃고 카지노를 닮아가고 있음을 우려한다. 기업의 실적보다 테마가 중요하고, 현금흐름보다 소문이 앞서며, 장기 투자보다 단기 차익이 시장을 지배한다. 주가가 오르면 이유가 만들어지고, 이유가 없으면 테마가 만들어진다. 주식시장이 기업의 미래를 평가하는 곳이 아니라 다음 사람에게 더 비싸게 넘길 수 있는지를 겨루는 투기판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국내 증시의 불안한 흐름도 단순히 금리와 환율, 외국인 자금 이탈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글로벌 유동성 변화와 지정학적 위험, 경기 둔화 우려가 겹친 가운데 투자자들의 심리까지 급변하면서 매수와 매도가 한쪽으로 쏠리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사이드카가 발동될 정도의 급격한 변동성은 시장이 기업 가치보다 투자 심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AI는 분명 진짜다. 생성형 AI에서 에이전틱 AI로, 다시 인간의 명령을 넘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피지컬 AI로 발전하면서 제조·금융·의료·국방·물류의 작동 방식 자체를 바꿀 가능성이 크다. AI는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증기기관과 전기, 인터넷에 비견될 범용기술이 될 가능성이 높다.
AI를 산업에 적용, 생산성 높이고 수익 창출하려면 시간이 필요
그러나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AI가 위대한 기술이라는 것과 AI 관련 주식이 모두 좋은 투자라는 것은 전혀 다른 명제다. 지금 시장에서는 이 둘이 뒤섞이고 있다. AI와 조금이라도 관련 있다는 이유로 기업의 실적과 재무구조를 따지지 않고 주가가 뛰는 현상이 나타난다. 데이터센터와 관련 있다는 소문, AI 공급망에 들어간다는 기대만으로 기업 가치가 급등한다. 닷컴 버블 당시 회사 이름에 ‘닷컴’을 붙이면 주가가 올랐던 장면과 닮았다.
물론 닷컴 버블이 터졌다고 인터넷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거품이 걷힌 뒤 진짜 기업이 살아남았다. 아마존과 구글 같은 기업은 수많은 인터넷 기업이 사라진 잿더미 위에서 성장했다. 거품은 기술의 실패가 아니라 가격의 실패였다.
AI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자본의 속도다. 기술은 뛰어가는데 자본은 너무 빨리 날라간다. AI가 실제 산업에 적용돼 생산성을 높이고 수익을 만들어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데이터센터를 짓고, 전력을 확보하고, 반도체를 생산하고, 기업의 업무 방식을 바꾸는 데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든다.
하지만 시장은 기다리지 않는다. 오늘 투자하면 내일 성과를 요구한다. 10년 뒤 AI가 만들어낼 가치를 오늘 주가에 미리 끌어와 반영한다. 기술이 10%도 성숙하지 않았는데 자본은 이미 100%의 성공을 가격에 담으려 한다. 이 둘의 간격이 벌어질 때 거품이 생긴다.
선순환으로 달리던 AI 생태계가 악순환의 도미노로 바뀌는 순간
AI 거품의 위험은 AI 내부보다 오히려 외부에서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 인플레이션 재발과 고금리 장기화, 지정학적 충격, 글로벌 신용 경색 등이 발생하면 미래의 수익을 기반으로 높은 평가를 받던 성장주부터 흔들릴 수 있다. 특히 AI 산업은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전력망 등 막대한 선행 투자가 필요한 자본집약적 산업이다.
금리가 오르고 유동성이 마르면 투자금에 의존하던 기업부터 흔들린다. AI 스타트업의 자금 조달이 막히고 인프라 투자가 줄면 관련 기업의 실적 전망도 악화된다. 주가 하락은 투자심리를 얼리고, 투자심리 위축은 다시 자금 조달을 어렵게 만든다. 이 때가 바로 선순환으로 달리던 AI 생태계가 악순환의 도미노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때 시장은 냉정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얼마를 벌고 있는가.” 물이 빠지면 누가 벌거벗고 수영했는지 드러난다는 말이 있다. 유동성이 풍부할 때는 모든 기업이 혁신기업처럼 보인다. 그러나 돈이 마르면 결국 매출과 이익, 현금흐름과 부채가 기업의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투기 열풍이 자본시장의 본래 기능까지 훼손한다는 것이다. 자본시장은 돈을 따기 위한 게임장이 아니다. 돈을 어디에 배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사회적 시스템이다. 기업가에게 도전할 자금을 공급하고, 혁신가에게 실패할 기회를 주며, 생산성이 높은 산업에 자원을 보내는 것이 자본시장의 사명이다.
진정한 AI 혁명을 위해서 단기 차익 아니라 장기적인 인내 자본 필요
주식시장이 카지노판이 되면 이 기능이 사라진다. 돈이 필요한 기업이 아니라 주가가 오를 것 같은 기업에 돈이 몰린다. 미래를 만드는 기업보다 미래를 포장하는 기업이 주목받는다. 장기적으로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보다 AI라는 이름을 붙인 기업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자본이 혁신을 돕는 것이 아니라 혁신의 이름을 이용해 투기판을 만드는 역설이 발생한다.
진정한 AI 혁명을 위해서는 단기 차익을 노리는 돈이 아니라 장기적인 인내 자본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본이 투기화되면 진짜 기술기업과 가짜 테마기업이 같은 대접을 받는다. 거품이 꺼진 뒤에는 정작 필요한 혁신 기업까지 자금난에 빠질 수 있다. 기술의 실패가 아니라 투기의 실패가 기술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한국 증시가 지금 경계해야 할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AI 시대가 열린다고 해서 AI와 관련된 모든 기업의 주가가 오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산업 대전환기에는 승자와 패자의 격차가 더 커진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와 HBM, 제조업, 조선, 자동차 등 세계적인 산업 기반을 갖고 있다. AI 확산은 한국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AI 시대가 온다’는 이유만으로 한국 증시 전체가 자동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력과 생산성, 자본력, 글로벌 공급망 지배력, 안정적인 에너지 확보 능력을 가진 기업만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다. AI라는 거대한 파도는 모든 배를 띄우는 것이 아니라 튼튼한 배만 먼바다로 데려갈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AI에 대한 비관이 아니다. AI를 제대로 믿기 위해서라도 투기와 투자를 구별하는 냉철함이다.
단기적인 주가 부양보다 장기 자본이 생산적 산업으로 흘러가도록 해야
투자자는 AI라는 이름만이 아니라 기업의 본질을 봐야 한다. 독점적 기술을 갖고 있는가. 실제 매출과 이익을 만들어내는가. 현금흐름은 건전한가. 금리와 유동성 충격을 견딜 재무구조를 갖췄는가. 10년 뒤에도 경쟁력을 유지할 진입장벽이 있는가.
정책도 단기적인 주가 부양보다 장기 자본이 생산적인 산업으로 흘러가도록 시장의 신뢰와 제도를 바로 세우는 데 집중해야 한다. 불공정 거래와 허위 정보, 묻지마 테마주 열풍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카지노의 돈은 테이블 위를 돌지만, 자본시장의 돈은 공장과 연구소, 데이터센터와 전력망으로 흘러가야 한다. 카지노는 승자의 주머니를 채우지만, 자본시장은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기술은 미래를 만들지만, 투기는 미래의 가격을 훔쳐온다. 지금 한국 증시가 경계해야 할 것은 AI가 아니다. AI라는 위대한 미래를 오늘의 투기 수단으로 소비하는 시장의 탐욕이다. 거품은 언젠가 꺼진다. 그때 살아남는 것은 가장 큰 꿈을 외친 기업이 아니라 가장 튼튼한 실적을 가진 기업이다. 그리고 거품이 걷힌 뒤에도 자본시장이 제 역할을 다하려면 다시 물어야 한다.
주식시장은 돈을 버는 카지노인가, 아니면 미래를 만드는 자본의 심장인가. AI 시대를 맞은 한국 증시가 답해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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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사) 서울이코노미포럼 공동대표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더뉴스24 주필
전 HCN지속협 대표회장
전 ㈜ 한림MS 기획상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