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기 바다를 누비던 암모나이트가 수천만 년의 지열과 압력을 받아 화염처럼 붉게 타오르는 보석으로 승화돼
대자연의 속살. 박물관의 묵직한 감동을 안고 밖으로 나오니, 후끈한 공기와 함께 맞이한 거대한 배드랜드의 협곡
수천만 년의 비바람이 빚어낸 척박하지만 경이로운 땅, 이른바 '배드랜드(Badlands)'
[민경중 기행칼럼] 캐나다 알버타주 캘거리에서 차를 몰고 동북쪽으로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평온했던 대초원이 무대 뒤로 사라지고 깎아지른 듯한 협곡과 기암괴석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수천만 년의 비바람이 빚어낸 척박하지만 경이로운 땅, 이른바 '배드랜드(Badlands)'에 들어선 것입니다.
거대한 공룡 조형물이 반기는 드럼헬러(Drumheller) 초입을 지나는 순간, 우리는 현생 인류의 얕은 시간을 벗어나 까마득한 3~4억년 전고생물학의 세계로 입장하게 됩니다.
이 황량한 협곡의 중심에는 세계 3대 공룡 박물관 중 하나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빛나는 ‘로얄 티렐 박물관(Royal Tyrrell Museum)'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유리벽 너머로 펼쳐진 '화석 복원 연구실(Preparation Lab)'의 풍경
박물관 내부는 뼈와 화석을 통해 생명의 기원과 진화의 방향성을 묻는 거대한 철학적 공간이었습니다.
앨버타의 자랑이자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산출된다는 유기질 보석 '아몰라이트(Ammolite)' 앞에서는 숨이 멎는 듯 했습니다.
백악기 바다를 누비다가 멸종된 암모나이트가 수천만 년의 지열과 압력을 받아 화염처럼 붉게 타오르는 보석으로 승화된 모습은 영겁의 시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예술 작품이었습니다.
미래 세대와 교감하는 살아있는 교육의 현장이 된 점이 무척 부러웠습니다.
웅장한 화석들만큼이나 제 가슴을 벅차게 했던 것은,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펼쳐진 '화석 복원 연구실(Preparation Lab)'의 풍경이었습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좇는 금발 아이들의 반짝이는 표정
이곳은 완성된 결과물만 화려하게 조명하지 않습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미세한 붓질과 공구를 다루는 연구원들의 고단한 일상을 날것 그대로 대중에게 공개하고 있었습니다.
유리창에 바짝 붙어 연구원의 손끝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좇는 금발 아이들의 반짝이는 표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현장에서 연구진과 아이들, 시민들 사이에 스스럼없이 질의응답이 오가는 모습을 보며, 지식은 닫힌 상아탑이 아니라 저토록 투명한 소통의 공간에서 다음 세대로 전수된다는 사실을 깊이 실감했습니다.
전시의 후반부, 제 발걸음을 오래도록 붙잡은 것은 한 뼘 두께의 얇은 'K-Pg 경계층' 암석 표본이었습니다.
지구를 호령하던 거대한 생명체들의 덧없는 퇴장
단면을 가로지르는 밝은 색의 수평 띠는 6,600만 년 전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했던 바로 그날의 흔적이었습니다.
이 얇은 찰흙암 띠 아래로는 공룡의 화석이 발견되지만, 그 위로는 공룡의 흔적이 영원히 사라져 버립니다.
우주에서 날아온 이리듐이 섞인 저 작은 암석 띠를 가만히 바라보며, 지구를 호령하던 거대한 생명체들의 덧없는 퇴장을 상상해 봤습니다.
수백만 년을 이어온 진화의 사다리 끝에서, 지금의 현생 인류는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자연스레 반추하게 되는 무거운 순간이었습니다.
후끈한 공기와 함께 거대한 배드랜드의 협곡
이제 박물관을 나서, 저 화석들을 품고 있는 진짜 대자연의 속살을 걸어볼 차례입니다.
박물관에서의 묵직한 감동을 안고 밖으로 나오니, 후끈한 공기와 함께 거대한 배드랜드의 협곡이 저를 맞이했습니다.
2년 전에는 방문객 관람대에서 멀리 조망하는데 그쳤지만 이번에는 직접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트레일 입구의 큼지막한 안내판은 이곳이 한여름이면 지표면 온도가 50도까지 치솟고 비가 오면 극도로 미끄러워지는 거친 환경임을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지층의 색채로 써 내려간 지구의 일기장
돌멩이 하나, 들풀 한 포기도 함부로 가져갈 수 없다는 엄격한 자연 보호의 규칙을 마음에 새기며 1km 남짓한 '배드랜드 해석 트레일(Badlands Interpretive Trail)'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거친 흙먼지를 날리며 가파른 트레일을 오르니, 겹겹이 쌓인 지층이 고스란히 드러난 웅장한 언덕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습니다.
과거 원주민들이 농사조차 지을 수 없어 '마코 시카(나쁜 땅)'라 불렀던 이곳은, 사실 대자연이 써 내려간 장엄한 일기장이었습니다.
하얗게 빛나는 사암층은 한때 이곳을 굽이쳤던 거대한 강물의 흔적이었고, 시선을 사로잡는 선명한 검은색 띠는 고대 늪지대의 무성했던 식물들이 압력을 견디며 만들어낸 석탄층이었습니다.
쪽의 캐나다 순상지(Canadian Shield)로부터 거대한 빙하에 갇힌 채 남서쪽으로 수백km 밀려서 내려왔다.
이후 기후가 따뜻해져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이 척박한 계곡에 덩그러니 남겨지게 된 것이다.
거대한 빙하를 타고 밀려 내려온 '미아석(Glacial erratics)'들
빙하기의 거대한 홍수가 휩쓸고 간 자리를, 지금도 비바람이 매년 0.5cm씩 느리지만 쉼 없이 깎아내며 땅속에 잠든 7천만 년 전의 화석들을 매일 새롭게 세상 밖으로 밀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황금빛 자갈길을 걷다 보면 주변의 붉고 잿빛 도는 백악기의 지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둥그스름한 바위들이 무심하게 흩어져 있습니다.
아득히 먼 캐나다 순상지(楯狀地, shield/'방패 모양의 땅'이라는 의미)에서부터 거대한 빙하를 타고 밀려 내려온 '미아석(Glacial erratics)'들입니다.
순상지는 주로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선캄브리아 시대 때 형성된 암석이 오랜 기간 침식작용을 받아 낮고 완만하며 이것이 방패를 엎어 놓은 듯한 모양을 이루는 데서 기인하였습니다.
스스로 불멸의 돌(규화목)이 된 그 나무결
백악기의 흙 위에 덩그러니 얹힌 빙하기의 바위,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아온 두 역사가 한자리에서 조우하는 풍경은 지구라는 캔버스의 스케일에 압도당하게 만듭니다.
규화목(硅化木)은 나무가 땅속에 묻힌 뒤 오랜 시간 동안 광물 성분이 스며들어 나이테와 세포 구조를 유지한 채 돌로 변한 나무화석(Petrified wood)입니다.
평범한 돌덩이인 줄 알았던 거대한 덩어리가 7,100만 년 전 웅장한 숲을 이뤘던 레드우드(삼나무)의 밑동 화석임을 알게 되었을 때는 경탄이 흘러나왔습니다.
억겁의 세월 동안 엄청난 압력을 견디며 스스로 불멸의 돌(규화목)이 된 그 나무결을 보며, 일상에서 무심히 곁을 내어주는 나무라는 소재의 숭고함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트레일의 백미는 단연 '후두(Hoodoo)'와 '벤치(Benches)' 지형이었습니다.
단단한 덮개돌을 우산처럼 쓰고 부드러운 흙기둥을 보호하며 솟아오른 후두의 아슬아슬한 균형, 그리고 철분을 머금은 단단한 내면 덕분에 끝까지 침식을 버텨내어 굳건한 평지가 된 벤치 지형.
비바람을 견뎌낸 단단한 내면과 은빛 생명력
그 쩍쩍 갈라진 메마른 벤치 위로는 놀랍게도 은회색 잎사귀를 반짝이는 '세이지브러시(야생 쑥)'가 강인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원주민들에게 감기와 복통을 다스리는 천연 구급상자였던 이 들풀은, 수분을 지키기 위해 잎을 솜털로 덮는 처절한 생존 경쟁 속에서도 타인에게 기꺼이 이로움을 내어주고 있었습니다.
한때는 공룡들이 뛰어 놀았던 1km의 짧은 순례길을 마치며 되돌아본 배드랜드는 멈춰있는 과거가 아니었습니다.
침식이라는 고통을 통해 영원을 기록하고, 척박함 속에서도 단단한 내면을 길러내는 가장 위대한 대자연의 실험실이었습니다.
신비로운 세이지브러시 향기를 뒤로한 채, 겸허해진 발걸음으로 협곡을 나섰습니다.
[부록] 로열 타이렐 고생물학 박물관(RTMP/ 흔히 로열 타이렐 박물관으로 불림) 소개
캐나다 앨버타주 드럼헬러에 위치한 고생물학 박물관이자 연구 시설입니다. 이 박물관은 조셉 버 타이렐을 기리기 위해 이름dl 붙여졌으며, 미들랜드 주립공원 내 BCW 건축사무소가 설계한 12,500㎡(135,000평방피트) 규모의 건물 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1981년 주 정부는 알버타 주립박물관의 고생물학 프로그램을 분리하여 고생물학 박물관 설립을 촉진하기 위해 고생물학 박물관 설립 노력을 발표했습니다. 4년간의 준비 끝에 타이렐 고생물학 박물관이 1985년 9월에 개관했습니다.
박물관은 1990년 6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왕립' 칭호를 부여받아 로열 타이렐 고생물학 박물관으로 이름이 변경되었습니다. 박물관 건물은 21세기에 두 차례 확장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BCW 건축사무소가 설계, 2003년에 완공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카시안 아키텍처가 설계, 2019년에 완공되었습니다.
박물관의 개인 소장품에는 350개 이상의 홀로타입으로 구성된 16만 점이 넘는 분류된 화석을 포함, 캐나다에서 가장 큰 화석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은 소장품 중 약 800점의 화석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전시물 외에 박물관의 화석 컬렉션은 지질학 및 고생물학적 역사를 기록, 분석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박물관 연구 프로그램에도 활용됩니다.
[캐나다에서=사진, 민경중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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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민경중 (nocutceo@naver.com)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언어문화학부 초빙교수
한국정책학회 전략부회장
㈜코아스 상임고문, 전 대표이사
제주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14년 미래창조과학부장관 표창
2004년 제24회 한국방송대상 앵커상
2018.02~2021.10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무총장
2010~2012.12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 심사위원회 위원장
2008~2010 CBS 보도국장
1996~1998 CBS 베이징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