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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 사회도 '금융치유사(金融治癒士)’가 필요하다
이제 우리 사회도 '금융치유사(金融治癒士)’가 필요하다
  • 권의종 주필
  • 승인 2026.06.15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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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 피해자, 투자 실패자 등 금융실패로 심리적 붕괴를 경험한 이들을 보듬어줄 제도 없어

숫자만 고치는 금융은 끝났다, 이제는 ‘금융의 인간화로...마이너스 통장보다 마이너스 마음부터

[권의종의 경제프리즘] 한국 사회는 ‘치유’에 열광한다. 마음이 지치면 심리상담을 받고, 몸이 고단하면 명상을 찾는다. 현대인의 스트레스가 다변화된 만큼 치유 산업과 제도도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정작 우리 사회가 가장 집요하게 외면하는 상처가 있다. 바로 ‘돈으로 인한 고통’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생존이자 신용이며 존엄이다. 통장 잔고는 한 인간의 사회적 위치를 대변하는 지표가 되었다. 따라서 돈을 잃는다는 것은 경제적 손실을 넘어 미래를 잃었다는 공포, 가치가 무너졌다는 절망, 사회로부터 낙오했다는 수치심을 동반한다. 가계부채는 천문학적 수준에 이르렀고 전세사기, 투자 손실, 폐업은 일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금융 문제를 지나치게 경제학적 언어로만 해석한다. 채무는 조정하면 되고 파산은 법적 절차로 해결하면 그만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숫자 자체가 아니라, 그 숫자가 인간의 내면에 남긴 깊은 상처다. 경제적 나락에 떨어진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재무상담만이 아니다. 무너진 마음을 먼저 일으켜 세울 치유의 손길이다.

숫자는 관리하나 상처는 방치하는 시스템

현행 금융지원 체계는 지나치게 숫자 중심적이다. 자산 관리와 채무조정, 법적 구제 절차는 존재하나, 금융 실패로 심리적 붕괴를 경험한 이들을 보듬어줄 제도는 사실상 전무하다. 전세사기 피해자, 투자 실패자, 폐업한 자영업자에게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은 이자 부담이 아니라 죄책감과 자기혐오다. 많은 이들이 실패를 경제적 사건이 아닌 인간성 실패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이 상태에서는 합리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공포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빚을 해결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더 위험한 선택을 하거나, 손실을 만회하려다 더 큰 수렁에 빠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금융 시스템은 이러한 심리적 붕괴를 개인의 유약함으로 치부한다. 숫자는 상담하나 감정은 상담하지 않고, 채무는 분석하나 절망은 분석하지 않는다.

여기서 ‘금융치유사’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들은 자산 상태와 심리 상태를 병행 진단하여 경제적 재기와 정신적 회복을 동시에 지원하는 융합형 전문가다. 마이너스 통장을 정상화하기 전에, 마이너스가 된 마음부터 회복시키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경제적 자해를 막는 ‘심리적 방역망’

우리는 무리한 투자와 반복되는 채무를 흔히 탐욕이나 무책임의 결과로 단정 짓는다. 하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영끌' 열풍이나 고위험 자산에 대한 집착은 상당 부분 심리적 불안의 산물이다. 뒤처질지 모른다는 조급함, 실패에 대한 공포가 경제적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다중채무자가 빚을 갚기 위해 또 다른 빚을 지고, 투자 실패자는 더 위험한 투자에 뛰어든다. 이는 경제적 무지가 아니라 심리적 패닉의 결과다.

그런데도 사회는 계속해서 '금융 교육'만을 처방전으로 제시한다. 무너진 마음을 방치한 채 교육만 제공하는 것은 골절 환자에게 진통제만 쥐여주고 달리기를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다.

금융치유사는 내담자에게 돈의 흐름이 아니라 감정의 흐름을 추적하는 전문가다. 왜 그렇게까지 돈에 집착하게 되었는지, 왜 실패 이후에도 위험한 선택을 반복하는지 묻고 치유해야 한다. 경제적 문제를 심리적 문제와 분리하는 순간 정책은 실패한다. 마음을 치유하지 못한 금융지원은 결국 임시 처방에 불과하다.

가장 값싼 복지는 가장 강력한 예방

금융치유사 제도에 대해 "개인의 실패까지 국가가 책임져야 하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 절망은 결코 개인의 파멸로 끝나지 않는다.

가정 해체, 장기 채무로 인한 사회적 고립, 극단적 선택과 생계형 범죄의 이면에는 어김없이 경제적 절망이 자리 잡고 있다. 한 사람이 사회 시스템 밖으로 밀려날 때 공동체가 부담해야 할 의료비, 복지비, 노동력 손실 등 사회적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관점에서 금융치유사는 소모적인 복지 비용이 아니라 사회적 손실을 줄이는 생산적인 '투자'다. 사후 수습보다 사전 예방이 훨씬 비용 효과적이다.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는 심리상담과 재무상담을 결합한 ‘금융 테라피(Financial Therapy)’가 새로운 전문 분야로 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정부 차원에서 주민센터나 신용회복 지원기관에 공공 금융치유사를 배치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자본주의 위에 인간의 얼굴을 새기는 일

자본주의는 효율을 중시하나 인간의 상처까지 치유하지는 않는다. 시장은 손실을 철저히 계산하나, 그로 인한 절망의 깊이까지는 계산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공동체의 역할이 존재하는 것이다.

돈 때문에 무너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때로 차가운 서류보다 "당신은 실패한 인간이 아니다"라는 연대의 한마디다. 진정 치유를 말하는 사회라면, 이제 돈이 남긴 상처도 치유의 영역으로 포섭해야 한다.

금융치유사 제도는 단순한 직업 신설이 아니다. 경제적 실패를 인간성의 실패와 동일시하는 잔인한 사회에 던지는 경종이며, 차가운 자본주의 위에 인간의 얼굴을 다시 새겨 넣는 최소한의 장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화려한 금융상품이 아니라, 무너진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금융의 인간화’다.

필자소개

권의종(iamej5196@naver.com)
- 주필 겸 금융소비자연구원장, 경영학박사
- 서울이코노미포럼 공동대표
- 전국퇴직금융인협회 금융시장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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