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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M, '성배(聖杯)’인가 '독배(毒杯)'인가...삼성을 멈춰 세우는 ‘룰의 전쟁’
HBM, '성배(聖杯)’인가 '독배(毒杯)'인가...삼성을 멈춰 세우는 ‘룰의 전쟁’
  • 권의종 주필
  • 승인 2026.05.18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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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의 총파업 예고, 무너진 ‘삼성식 신뢰 공식’...해법은 결국 ‘투명성의 제도화’와 ‘글로벌 스탠다드 도입’

[권의종의 경제프리즘] 인공지능(AI) 열풍이 촉발한 고대역폭 메모리(HBM) 경쟁은 한국 반도체 산업에 거대한 기회이자 혹독한 시험대가 되고 있다. 엔비디아 중심의 글로벌 공급망에서 천문학적 수익이 창출되는 동안, 그 이면에서는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흔드는 내부 균열도 깊어지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 노조의 총파업 예고와 상시화된 노사 갈등은 단순한 노무 문제를 넘어선다. 이는 과거 “성과가 있는 곳에 보상이 따른다”는 삼성식 관리 체계와 신뢰 공식이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신호다.

현재 삼성의 노사 갈등은 임금 인상이나 복리후생 확대를 넘어 ‘룰(Rule)의 전쟁’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노동조합은 투명한 성과급 산정 기준과 예측 가능한 보상 체계를 요구하는 반면, 경영진은 급변하는 시장 환경과 업황 변동성을 이유로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대립이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이 가장 치열한 시점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2나노미터(2nm) 이하 초미세 공정과 차세대 HBM 시장 선점을 위해 전사적 역량을 집중해야 할 시기에, 내부 에너지가 성과급 갈등으로 분산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내외 반도체 및 조직 전문가들은 현재 상황을 ‘성장 정체와 분배 욕구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구조적 징후’로 짚어낸다. 고속 성장기에는 사측이 제시하는 일방적 보상 체계가 어느 정도 수용되었으나, AI 시대에 접어들며 노동자들의 공정성 기준은 훨씬 높아졌다.

전문가들은 갈등이 장기화될 경우 핵심 연구개발(R&D) 인력 이탈과 조직 사기 저하로 이어져, 기술 초격차의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호황의 과실을 특정 주체가 독점하거나, 반대로 불황의 부담을 노동자에게만 전가하는 방식으로는 지속 가능한 혁신을 유지하기 어렵다.

‘초과이익’의 착시와 고정비의 역습

반도체 산업의 본질은 냉혹한 ‘사이클 산업’이다. 생성형 AI 열풍이 막대한 초과이익을 안겨주고 있지만, 이는 기술 우위뿐만 아니라 지정학과 거시경제 흐름이 맞물린 결과다. 지금의 호황은 언제든 급격히 꺾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시적 호황을 전제로 경직된 고성과 보상 체계를 제도화하는 것은 기업 재무에 심각한 장기적 부담이 될 수 있다. 업황이 하강 국면에 접어드는 순간, 이는 거대한 고정비 부담으로 되돌아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반도체 기업의 생존은 결국 불황기에 얼마나 충분한 현금성 자산을 확보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적자가 누적되는 시기에도 차세대 생산라인 투자(CAPEX)와 연구개발을 멈추지 않아야 다음 사이클의 승자가 될 수 있다. 실제로 경쟁사 TSMC는 안정적인 노사 환경과 국가적 지원을 바탕으로 경쟁 우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반면 한국 기업들이 내부 갈등에 자원과 에너지를 소모한다면, 이는 스스로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글로벌 전문가들은 한국 반도체 산업이 ‘단기 이익 극대화’라는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한다. 미국 인텔과 일본 라피더스(Rapidus)가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매섭게 추격하는 상황에서, 매년 반복되는 성과급 갈등은 대외 신뢰도와 공급망 안정성만 저해할 뿐이다.

성과급이 동기부여 수단이 아니라 구조적 부담으로 변질되면, 그 여파는 결국 고용 불안이라는 형태로 노동자에게 되돌아온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기 현금 보상 확대가 아니라, 고용 안정성과 미래 투자 재원을 함께 고려하는 고도화된 ‘리스크 셰어링(Risk Sharing)’ 모델이다.

정치가 흔드는 시장 원리, 필요한 것은 ‘정교한 설계’

기업 내부 갈등만큼 우려스러운 것은 정치권과 정부의 과도한 개입이다. 포퓰리즘적 시각에서 제기되는 ‘국민배당금’이나 초과이익 환수 논리는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 정치가 기업의 혁신 성과에 과도하게 개입할수록 경영진의 투자 의지는 위축되고 기업가 정신은 약화된다. 글로벌 보조금 전쟁 속에서 자국 기업 보호에는 소극적이면서, 기업이 치열한 경쟁 끝에 얻은 수익을 정치적 재원으로 활용하려는 접근은 시장의 신뢰를 떨어뜨릴 뿐이다.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해법은 결국 ‘투명성의 제도화’와 ‘글로벌 스탠다드 도입’으로 요약된다. 첫째, 성과급 산정 체계의 전면적 고도화가 필요하다. 단순히 영업이익 일부를 배분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R&D 투자 규모, 미래 기업 가치, 거시경제 리스크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하는 체계를 노사가 공동 설계해야 한다. 사측은 산정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노조 역시 확정급 중심의 요구에서 벗어나 성과 연동형 구조를 수용하는 현실적 타협이 필요하다.

둘째, 단기 현금 보상을 넘어선 주식 보상 프로그램(RSU 등)을 확대해야 한다. 실리콘밸리 빅테크 기업들처럼 노동자를 단순한 피고용인이 아닌 미래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로 바라보는 접근이 요구된다. 이는 기업의 현금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장기 성장의 성과가 노동자의 자산 형성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

AI 시대의 주도권은 영원하지 않다. 오늘의 승자가 내일의 패자가 되는 것이 반도체 산업의 냉혹한 현실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당장 나눌 파이의 크기를 두고 싸우는 소모적 갈등이 아니다. 더 큰 파이를 만들고, 혹독한 불황의 겨울을 버텨낼 수 있는 정교한 설계도다. 정부는 규제 혁신과 인프라 지원이라는 본연의 역할에 집중하고, 노사는 소모적인 대립을 멈추고 생존을 위한 제도적 대타협에 나서야 할 때다.

필자소개

권의종(iamej5196@naver.com)
- 주필 겸 금융소비자연구원장, 경영학박사
- 서울이코노미포럼 공동대표
- 전국퇴직금융인협회 금융시장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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