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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보 왔습니다!"...우리 주변에서 사라지고 잊혀지는 것들
"전보 왔습니다!"...우리 주변에서 사라지고 잊혀지는 것들
  • 정종석
  • 승인 2023.11.19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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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전보 서비스’ 종료...땀냄새 나는 전보나 때묻은 편지는 이제 옛날 일...통신 만능 시대의 아쉬운 자화상

[정종석 칼럼] '조부위독(祖父危篤)'-. 6.25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초, 학도의용대원으로 복무하고 있던 23살의 YS(김영삼 전 대통령)는 '조부 위독'이라는 긴급 전보(電報)를 받았다.

황급히 고향으로 내려가 보니 할아버지는 웬걸 건강하시기만 했다. 아들을 빨리 장가보내서 대를 잇게 하려던 YS 부친(김홍조)이 YS가 결혼을 하지않겠다고 한사코 버티자 맞선을 보게 하려고 일부러 가짜 전보를 친 것이다. 그렇게 불려온 YS가 고향에서 만난 결혼하게 된 처녀가 훗날 퍼스트레이디가 된 부인 손명순 여사이다.

지난 1986년 가을 필자는 정치부 기자 시절 당시 야당인 신한민주당 고문이던 YS의 독일, 이탈리아 유럽방문을 수행취재하면서 이같은 얘기를 직접 귀로 전해들었다. 때마침 손 여사도 그때 유럽순방길에 동행을 했었다. 가짜전보를 받고 결혼하게 된 경위를 YS가 직접 밝히자 옆에 있던 손여사도 쑥스러웠던지 얼굴이 다소 빨개지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YS는 나중에 국가원수인 대통령까지 되었다. 아버지의 결혼권유에 꿈쩍 않던 아들 YS를 움직인 건 속임수였지만, 그때 비상연락수단이 '전보'였다는 것을 스마트폰과 각종 SNS에 익숙한 요즘 젊은 세대가 쉽게 이해할 지 모르겠다.

원로 방송인 고(故) 송해씨도 생전에 한 방송에서 6·25 휴전 전보를 자신이 직접 쳤다고 밝히기도 했다. 기나긴 전쟁 끝에 휴전이라는 빅뉴스를 전보를 통해 전할 만큼, 그 당시에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연락 수단이었던 것이다. 또 향의 부모님에게 자녀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한 수단도, 그 어렵다는 사법 고시에 합격했다는 희소식을 가족과 친지들에게 전달한 수단도 모두 전보였던 시절이 있었다.

130여년 전 이 땅에 등장할 때부터 전보란 늘 받는 사람의 손을 떨리게 만들 정도로 긴급 연락수단의 대명사였다. 활자로 또박또박 찍힌 몇 글자의 메시지가 주는 엄중함은 편지나 전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적어도 '1가구 1전화' 시대가 열리기 전인 1980년대 초까지도, 전화 없는 사람에게 가장 빨리 연락할 수단은 전보 밖엔 없었다. 요금은 글자 수대로 부과됐다. 따라서 어떻게든 말을 줄여야 했다.

1800년대에 시작돼 138년간 이어져 온 전보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

"아버님이 돌아가셨으니 빨리 집으로 오너라"라는 내용은 '부친사망급래'다. 지방 출신 학생들이 고향에 보낸 '책값송금요망'이라는 전보는 "하숙비나 용돈이 떨어졌으니 돈을 부쳐 주세요"라는 뜻이었다. 누군가는 군대 갔을 때 휴가를 가고 싶어 관공서용 전보인 관보(官報)를 이용해 '○○별세급래' 등 누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보내게 했다는 얘기도 있다.

전보(電報)는 이용자가 알리려는 내용을 전기통신설비를 이용하여 문자로써 빠르게 수취인에게 배달하여 알리는 통신수단이다. 어느 모임에서 전기, 전화, 전보 이런 것이 처음 들어오던 시절 얘기가 화제에 오른 적이 있었다. 참석자 한분이 전보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알고 보니 서울토박이로 평생 서울에서만 살다가보니 지압에서 본 사람처럼 전보를 받을 일이 없었다고 한다. 지방출신인 필자도 아주 오래 전에 전보를 받아보았으니 참으로 오래된 일이다. 그만큼 요즈음 거의 이용하지 않는 전신 도구이다.

옛날 앨범을 뒤져보면 학교 졸업 때, 또 결혼 때 친지와 하객들이 보낸 축하 전보를 보관하고 있는 것이 있다. 세월이 가니 이것이 기념물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전보 때문에 인생이 바뀌었다고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가, 집에서 '모친 위독'이라는 전보가 와서 내려갔는데, 어머니 병구완을 하다가 직장생활도 해보지 못하고 결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전보가 바꾼 인생이었다.

1800년대에 시작돼 138년간 이어져 온 전보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KT의 ‘115 전보 서비스’가 다음 달 15일 종료된다. 멀리 타향살이를 하는 가족에게 경조사를 알릴 때 없어선 안 될 통신수단이었지만, 이제 휴대전화와 이메일에 밀려 설 곳을 잃은 것이다. KT 측은 “통신 시장 환경 변화로 전보 이용량이 매년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면서 “누적 적자 증가로 더 이상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국내에서는 1885년 한성전보총국이 서울-인천 간 첫 전보를 보냈다. 광복 이후에는 체신부와 KT의 전신인 한국전기통신공사로 서비스가 이관돼 역사를 이어왔다. 1990년대에 휴대전화와 이메일이 빠르게 보급되면서 이용량은 가파르게 줄었다. 일부 과거를 추억하는 이들이 축하 메시지를 보낼 때나 사용하면서 명맥만 유지해 왔다. 해외에서도 미국 웨스턴유니언이 2006년 전보 서비스를 종료했고, 독일 우체국도 올해 1월 서비스를 중단했다.

전보는 우리 삶의 온갖 경조사 때 마음 전하는 수단으로 명맥 이어와

전보의 전성기이던 1975년 전보 이용 건수는 6500만건이나 됐다. 편지는 걸어서 배달해도, 전보는 자전거로 전달했다. 종일 안장에 앉아 500여통씩 나르던 배달원들은 엉덩이에 못이 박였다. 1964년에는 자전거 타던 배달원 중 37명이 치질에 걸렸다고 한다.

당국도 가끔 실수를 했다. 1969년 10월 경남의 할머니가 서울의 아들 집을 방문하기 전 '모친상경'이라고 전보 신청을 했는데 '모친사망'으로 잘못 배달됐다. 장례 준비까지 시작했던 아들은 당국 잘못이 밝혀지자 국가를 상대로 45만원(약 2500만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냈기도 했다.

1997년쯤부터 전보는 더 이상 긴급 연락용으로 쓰이지 않게 됐다. 이때는 우리나라에 휴대전화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라는 점에서 이해가 된다. 전보는 우리 삶의 온갖 경조사(慶弔事) 때 마음을 전하는 수단으로 명맥을 이어왔다. 조심조심 봉투를 뜯어 꺼내 보는 종이 한 장의 느낌은 현재처럼 스마트폰에서 즉각적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의 가치와는 비교가 어려울 것 같다.

요즘은 상경한 유학생들이 '부모님 전 상서'로 시작하는 편지도 쓰지 않는다. 세상은 너무도 빨리 변하고 있다. 통신수단의 혁명은 하루의 일과가 스마트폰으로 시작해 스마트폰으로 끝난다. 일과시간의 업무도 컴퓨터로 시작해 컴퓨터로 끝난다. 

경조사 등 일상 소식을 전하던 전보의 퇴장은 통신기술 발달에 따른 자연적인 현상이다. 디지털시대를 맞아서 SNS 매체의 발달로 공간의 제약 없이 실시간으로 대량소통하는 시대다.

전보와 편지같은 것들이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가는 것이 아쉽다. 아날로그 시대의 정겨운 유물들을 흐르는 세월 앞에 보내야 한다. 디지털 소외계층은 이제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꾸려가기도 어렵다. 디지털뱅킹도 쉽게 이용하기 힘들고, 음식점이나 커피숍에 가서 키오스크를 통해 메뉴를 주문하기도 겁이 난다.

불과 몇자에 불과한 전보에 의해 가족의 안부와 경조사 전달 등 사회적 소통이 되던 시절과 달리, SNS 세상의 메시지 언어는 빠르고 편리하지만 가볍고 삭막하며 때로는 폭력적이기도 하다. 현대의 디지털시대에는 과거처럼 땀냄새 나는 전보나 때묻은  편지로 정을 느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날로그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갈수록 디지털시대의 고독과 소외가 늘어나고 있다. 느림의 미학이 사라진 가운데 소통의 본질과 바탕이 급변한 지금 디지털통신 만능시대의 아쉬운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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