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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만 외교관의 막다른 선택
어느 대만 외교관의 막다른 선택
  • 허영섭
  • 승인 2018.09.19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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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섭 칼럼] 일본 간사이공항 폐쇄 사태에 따른 자국 국민 지원대책이 미흡했다는 논란 끝에 현지에 주재하는 대만 외교관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타이베이경제문화대표부의 오사카 수치청(蘇啓誠) 사무소장이 지난 14일 자신의 거주지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올해 예순한 살. 가족들에게 남긴 유서도 발견됐다. 태풍 ‘제비’로 인한 간사이공항 침수 사태를 계기로 유사 상황이 발생할 경우의 위기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일본주재 대만 관련부처 회의가 예정되어 있던 하루 전에 일어난 일이다.

가뜩이나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입지가 위축되는 상황에서 대만 사회가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대만을 압박하는 위치에 있는 중국의 현지 영사관이 대형버스를 동원해 자국 국민을 탈출시킨 사실과 대비를 이룬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극단적 선택에 이른 수 사무소장에 대해서는 추모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대만 외교부는 “헌신적이고 성실한 자세로 후배 외교관들에게 모범을 보였던 외교관이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으며, 차이잉원(蔡英文) 총통도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우리 외교관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가 지난 7월 오사카 사무소 책임을 맡은 지 불과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아 이처럼 비극적인 상황을 맞게 됐다는 사실이다. 직업 외교관인 수 소장은 ‘대만-일본 교류협회’ 근무를 거쳐 오사카로 옮겨오기 직전까지 오키나와 나하대표부 사무소장을 지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과 정식 국교가 끊어져 있는 대만은 도쿄에 대표부를 두고 있으며 오사카와 후쿠오카, 나하, 요코하마, 삿포로 등에 사무소인 ‘판사처(辦事處)’를 두고 있다.

이번 사태의 발단은 단순하다. 태풍의 영향으로 지난 4일 공항이 폐쇄되자 제때 귀국하지 못한 채 현지에 발이 묶인 대만 여행객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오사카 사무소가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비난한 것이다. 일부 여행객이 사무소로 전화를 걸어 숙소에 대한 도움을 요청했으나 직원으로부터 “어떻게 도와 달라는 거냐, 어디에 머물든 당신의 선택일 뿐”이라는 응답을 들었다는 얘기도 공개됐다. 간사이공항이 오사카는 물론 교토, 고베, 나라 지역 일대의 관문이라는 점에서 적잖은 여행객들의 발길이 묶였을 것이다.

이에 비해 중국 영사관은 15대의 관광버스를 동원해 자국 관광객이 이동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대만 대표부에 거센 비난이 쏟아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더욱이 중국 측이 대만 관광객들에 대해서도 ‘중국 국적’임을 인정하는 경우 버스에 타도록 허용하기도 했다는 얘기까지 전해진다. 대만의 입장에서는 허를 찔린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수 소장이 오사카 사무소의 최고 책임자로서 책임을 미루기 어려웠고, 끝내 마지막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당시 공항에는 3,000여 명의 외국인이 발이 묶여 있었는데, 대만인과 중국인이 각각 500명, 750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진다.

궁금한 것은 그때 우리 오사카 총영사관의 대응이 대만 공관의 경우와 얼마나 달랐을까 하는 점이다.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일단 보도된 내용으로 미뤄본다면 그렇게 내세울 만하지 못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평소 교민들의 이익을 위하기보다 서울에서 높은 분들이 행차하는 데 더 신경을 쓰도록 훈련된 분위기가 돌발상황을 맞아서도 쉽게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사관은 여권을 잃었을 때만 찾아가는 곳”이라는 교민이나 유학생들의 인식에서도 ‘의전 외교관’들에 대한 불신감을 느끼게 된다.

문제는 오사카뿐만이 아니다. 우리 교민들이 현지 경찰에 체포되거나 구금되었을 경우에도 영사 책임자들과의 면담이 제대로 이뤄지는 경우가 드물다는 게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교민들의 대체적인 하소연이다. 이를테면, 집단폭행과 같은 쌍방 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경우에도 상대방 영사 관계자는 재판정에까지 참석해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는데도 우리 책임자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스스로 책임을 지려고 나섰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오히려 공금횡령이나 섹스 스캔들로 물의를 빚는 사건도 자주 일어난다. 이런 형편이라면 내용이 과장됐다고 논란을 빚었던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이 진짜 현실로 나타날 소지도 없지는 않다.

한편, 이번 경우에도 도쿄에 주재하는 대만의 셰창팅(謝長廷) 대표(대사)는 간사이공항 폐쇄 사태가 이어지던 당시 페이스북에 오는 11월의 국내 지방선거와 관련해 답변을 쓰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면서 구설수에 올랐다. 해외에 파견돼 있으면서도 현지 사태보다는 본국 정치에 더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던 셈이다. 천수이볜(陳水扁) 총통 당시 행정원장을 지냈고 2008년 대선에서는 총통 후보로까지 출마했던 정치적 비중에 의해 일본 대표로 임명된 주인공의 처신이다. 일본에 거주하는 대만 교민들이 앞으로 그를 어떤 눈길로 바라볼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칼럼은 "자유칼럼그룹의 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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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허영섭(gracias1234@edaily.co.kr)

 

 

 

이데일리 논설실장. 전경련 근무. 경향신문과 한국일보에서 논설위원 역임. 미국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스쿨 방문연구원.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대만, 어디에 있는가', '영원한 도전자 정주영'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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