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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의 불평등과 사라진 ‘사회정의’
운의 불평등과 사라진 ‘사회정의’
  • 주윤정
  • 승인 2021.10.08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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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윤정] 현대 사회는 개인의 선택과 노력에 기반한 능력에 입각해,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공정한 기회를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능력주의를 강조했다. 하지만 최근 사회학 연구에서는 운과 불운, 불평등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증가하고 있는데, 개인의 능력, 선택과 노력만으로 성공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운이 성공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이들은 부모의 행운이, 자식의 행운으로, 부모의 불운이 자식의 불운으로 이어지는 운과 불운의 연쇄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어떤 사회경제적 지위를 지닌 부모에게서 태어나느냐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철저히 운의 문제이다. 결국 운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는 능력주의와 기회의 평등, 공정 담론의 허구를 밝히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도 능력주의와 공정은 중요한 사회적 의제 중의 하나이다. 입시, 취직 등 삶의 중요한 과정에서의 공정이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과정, 그런 게임에 뛰어들지 조차 못하는 이들에게 게임의 룰의 공정이 무슨 소용인가. 공정이란 것은 결국 어느 정도의 자격과 능력,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 운을 발휘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공정과 기회가 아닌가?

어느 사회나 법을 통한 형식적 평등이 정착되더라도, 보이지 않는 선과 금, 차별과 실질적 불평등은 계속 존재한다. 현재 한국 사회의 위기는 게임을 어떻게 공정하게 진행하냐만이 아니라, 어떤 게임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수준이다. 우리는 불평등의 문제와 정의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헌법의 역사에서 ‘정의’는 헌법 전문과 경제조항에 등장했었다. 제헌헌법 이래 87년 헌법 이전까지 경제 조항에는 ‘사회정의’가 들어있었다. 제헌헌법의 84조에는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제헌헌법에 이런 급진적 조항이 들어간 것은 독일 바이마르 헌법의 영향이기도 하고,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양진영의 복합적 역학관계의 반영이라 한다. 흔히 87년의 헌법은 민주주의 체제를 보장하는 진보적 헌법이라 알려져 있지만, ’사회정의’는 87년 헌법에서부터 사라지고 다소 애매한 ‘경제의 민주화’로 대체되었다.

헌법의 경제 조항에서 국민경제가 우선이 아니라 시장의 자유를 우선시하기 된 것은 1963년부터였지만, 유신헌법에도 5공헌법에도 사회정의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군사독재조차도 사회정의는 중시했고, 국가주의적인 감각으로 이를 활용했다.

하지만 1987년, 80년대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 사회주의의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가 유지되기 어려웠는지 ‘사회정의’는 헌법에서 삭제되었다. 사회정의의 언어는 헌법에서도 공적 담론에서도 사라지고, 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공정이 이를 대체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경제 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하게 하는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함이라기 보다, 엄청나게 운이 좋은 특정 계층의 이익을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루 하루 손발 열심히 써 일하는 그저 그런 운을 지닌 보통 사람들은 이에 절망해 미래를 포기하고 있다. 삶의 기본적 수요인 집을 이용한 천문학적인 불로소득은 단순히 실정법상의 불법의 문제 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도덕감정, 정의의 관념을 훼손한다.

21세기 한국사회는 헌법에서 사라진 ‘사회정의’를 다시 불러내어, 타고난 운의 불평등이 사회의 토대와 미래를 훼손하는 것을 막을 수 있도록 새로운 사회적 상상, 규범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새로운 사회정의의 언어는 인간과 뭇 생명의 존엄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 인권을 존중하며, 국가주의로 환원되지 않아야 할 것이며, 또한 기후위기의 시대에 환경정의와 생태정의 등 정의의 경계를 확장해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과의 정의로운 관계로 지평을 확장할 필요도 있다. 지금은 사회정의의 새로운 언어와 규범에 대한 상상력이 절실한 때이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글쓴이 / 주 윤 정
·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선임연구원
· 한국인권학회 학술이사

· 연구 논문
『탈시설 운동과 사람중심 노동: 이탈리아의 바자리아법과 장애인 협동조합운동』 담론 201, 2019, 22(2)
『법 앞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해방과 기다림의 정치』 민주주의와 인권, 2018, 18(4)
『보이지 않은 역사: 한국시각장애인의 저항과 연대』 (들녘,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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