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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장만도 못한 금융시장... ‘가격표시’ 불모지로 방치
전통시장만도 못한 금융시장... ‘가격표시’ 불모지로 방치
  • 권의종
  • 승인 2021.07.12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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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자 일방이 정하는 금리, ‘부르는 게 값’...그러고도 소비자에게 적용 금리 알리기 꺼려

[권의종의 경제프리즘] 가격표시의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장에 가면 물건값을 흥정해야 했다. 귀찮고 성가셨다. 상인은 깎을 걸 대비해 값을 올려 불렀고, 고객은 다만 얼마라도 값을 깎아야 직성이 풀렸다. 1975년 변곡점을 이뤘다. 물가안정에 관한 법률 제3조가 시행되면서 이런 풍경은 차츰 자취를 감췄다. 사업자가 생산·판매하는 물품에 가격표시를 의무화하는 가격표시제가 강제된 결과였다.

현재 행하여지는 가격표시제는 종전의 공장도가격 표시의무제, 소매가격 및 공장도가격 표시제가 1998년과 1999년에 각각 폐지되며 생겼다. 산업자원부 가격표시제 실시요령에 따라 판매가격표시제와 단위가격표시제로 구분된다. 판매가격표시제는 판매자가 일정 판매시점에 있어서 반드시 제품에 표시된 가격으로 판매한다는 것을 소비자에게 알리는 제도다.

제조업자가 판매가격을 정하는 기존의 권장소비자가격 제도와는 달리, 최종 판매업자가 실제 판매가격을 정해 표시한다. 공장도가, 권장소비자가, 판매가 등으로 나뉘었던 가격표시체계가 하나로 통일되었다. 소비자의 혼란을 줄이고, 권장소비자가격이 과도히 책정되어 합리적 소비가 이뤄지지 못하는 걸 막으려는 의도였다. 최종 판매단계에서 가격경쟁을 촉진하려는 취지도 담겼다.

단위가격표시제는 중량ㆍ수량 단위로 거래되는 품목에 대해 단위가격을 표시, 소비자에게 정확한 가격정보를 제공하여 합리적 선택을 도모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상품의 용량, 규격 및 품질의 종류가 다양해 판매가격만으로 가격 비교가 어려운 품목에 표시할 수 있다. 가공식품, 일용잡화, 신선식품 등이 대상이다. ‘○○g당 가격 ○○원’ 등 소비자가 쉽게 알아볼 방법 또는 크기로 선명하고 명확하게 표시해야 한다.

공급자 기피로 정확한 금리 파악이 힘든 소비자...내라는 대로 내는 수밖에 달리 방도 없어

가격표시제 영역은 생각보다 넓지 않다. 물품 중에서도 중간재나 기계설비 등에는 원칙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주로 최종소비재에 제한적으로 운용된다. 1999년 9월 일부 가전제품과 의류 등에 판매가격 표시제도를 도입한 후 대상 품목이 늘어났다. 2010년 7월에는 권장소비자가격과 실제 판매가격의 차이가 20% 이상인 가전제품, 의류, 식품 등 243개 품목에 대해 판매가격표시제를 시행했다.

금융시장은 전통시장만도 못하다. 가격표시 불모지다. 금융의 가격은 금리다. 금전을 사용한 대가로 원금액과 사용기간에 비례해 지급된다. 경제학에서는 자본용역(資本用役)의 제공에 대한 보수라고 점잖게 정의한다. 이토록 중요한 금리가 푸대접 신세다. 제대로 표시되지 않는다. 공급자가 밝히기를 꺼린다. 금융거래확인서에는 금리 표시가 공란이거나 *.* 등으로 블라인드 처리다. 금융상품에도 가격이 명시돼야 한다. 금융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당위성이 뚜렷하다.

금리 결정은 공급자의 우월적 지위에 따라 불공정하게 이뤄질 공산이 크다. 금리는 돈을 빌려 쓴 사람이 적정한 비율로 지급해야 하나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 영 딴판이다. 곤궁한 차입자의 처지에서는 높은 금리를 감수하고라도 돈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중세 유럽에서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기독교 교리로 엄격히 금했다. 그 틈을 타 유대인은 대금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계약자유의 원칙이 보편적 사회윤리로 자리 잡으면서 상호 약정에 따라 이자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금리 결정은 공급자 일방의 주도로 이뤄지는 게 상례였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교섭력이 미약한 소비자는 여전히 공급자가 정하는 금리를 그대로 따르는 실정이다. 부르는 게 값이다.

금융은 디테일이 열쇠...큰 노력과 비용 안 들이고도 법 기준 뛰어넘는 세심한 배려가 긴요

금리가 물품 가격과 다른 점은 또 있다. 변동성이다. 일반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은 대개 구매할 때 정해진다. 금리는 꼭 그렇지 않다. 돈을 빌릴 때 이자율이 확정되는 고정금리 상품 말고도, 대출 후 이자율이 달라지는 변동금리 상품이 있다. 고객별로도 신용등급, 대출금액, 거래실적, 여신 취급경비 등 거래조건에 따라 적용 금리가 수시로 달라진다. 소비자는 자신이 부담하는 정확한 금리를 파악하기 어렵다. 내라는 대로 내는 수 밖에 없다.

예금거래도 그렇지만, 특히 대출거래에서 가격표시제 도입이 절실하다. 표시방식도 어렵지 않다. 금리를 따로 표시해도 무방하나, 대출 명칭에 함께 적으면 더 편리할 수 있다. 예컨대 일반대출을 연 3.5% 이자율로 빌릴 경우, ‘일반대 0350’으로 표시하면 된다. 추후 이자율이 연 4.0%로 변동되면 ‘일반대 0400’으로 고쳐 표시하면 그만이다. 그래야 소비자가 자신이 부담하는 금리와 변동내용을 언제 어디서든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금리가 표시되는 대출이 지금도 없는 건 아니다. 햇살론의 경우 명칭에 금리가 함께 표시된다. 최근 최고금리 인하에 따른 금리하락을 반영해 기존 햇살론17이 햇살론15로 변경 출시되었다. 금리가 연 17.9%에서 연 15.9%로 2%포인트 낮춰진 사실을 변경된 명칭을 통해 개략적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햇살론 1790’, ‘햇살론 1590’으로 좀 더 상세히 표시되면 좋을 것이다.

작금의 금융시장에 소비자 보호의 움직임이 감돈다.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이 새롭게 시행되었다.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으나, 오랜 기간 힘든 진통을 거쳐 탄생했다. 금융소비자의 기대감이 남다르다. 그렇더라도 법이 만능일 수 없다. 법 제정만으로 금융 현안을 처리하기 어렵다. ‘금리표시제’처럼, 큰 노력과 비용을 안 들이고도 법 기준을 뛰어넘는 세심한 배려가 되레 긴요할 수 있다. 금융은 디테일이 열쇠다.

필자 소개

권의종(iamej5196@naver.com)
- 논설실장
- 부설 금융소비자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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