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미술관 유치 ‘과열’...‘연고(緣故)' 치우쳐 문화예술 도외시하나
이건희 미술관 유치 ‘과열’...‘연고(緣故)' 치우쳐 문화예술 도외시하나
  • 권의종
  • 승인 2021.05.21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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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관리에 대한 계획은 사전에 관리해야’ 인식 심어져야...그것이 故 李회장 유지(遺旨)와도 부합하는 일

[권의종의 경제프리즘]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심미안을 가졌다. 반도체 기술의 미래를 내다본 혜안과 함께 고도의 예술적 안목의 소유자다. 유족 측은 이 회장이 40여 년간 수집·소장해온 미술품 2만3천여 점을 국공립기관에 기증할 뜻을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많은 국민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별도의 전시실이나 특별관 설치를 주문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전담반을 꾸려 본격적 논의에 들어갔다. 발표가 나자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미술관 유치 의사를 밝히고 나섰다.

분위기 과열 조짐이 보인다. 내세우는 명분과 이유가 제각각이다. 부산시가 발 빠르다. 미술관이 들어설 위치를 부산 북항으로 공식화한 가운데 민간차원의 유치위원회를 발족한다. 부산시장은 “부산 북항에는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부산 오페라하우스가 건립 중인데, 그와 나란히 이건희 미술관이 들어선다면 시너지 효과가 엄청날 것”으로 자평했다.

대구시와 경북도가 손을 잡았다. 미술관 대구 유치를 위한 공조에 나섰다. 경북도지사는 “삼성이 대구에서 출발했고, 구미에서 삼성전자로 우뚝 섰다”고 강조했다. 대구시장은 “1938년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이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창업했고, 4년 뒤 이건희 회장이 대구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 대한민국 근대미술의 기반을 다진 대구야말로 이건희 미술관의 최적지”임을 내세웠다.

세종시는 여러 이점을 나열했다. 전국에서 1시간 내 올 수 있는 국토의 중심부, 철도, 고속도로, 지하철, 공항 등 완벽한 교통수단, 5대 국립박물관 등 박물관 단지의 조성, 제2의 행정수도로서 수도적 지위에 버금가는 상징성 등을 강점으로 꼽았다. 오산시는 내삼미동에 당장 공사를 시작할 수 있는 3만8천여㎡의 시유지를 확보했고, 관광단지 내 다양한 볼거리, 인천공항과 경부고속도로와 같은 교통 접근성 등을 유치 근거로 들었다.

경기도는 북부지역 미군 공여지에 미술관 건립을 정부에 건의했다. 경주시도 뛰어들었다. 신라 천년고도와 불교문화의 상징 도시로서 국내 최대 관광지라는 차별성을 제시했다. 신라 왕경 복원과 연계한 역사 문화도시, 국가균형발전 차원, 지방 중소도시의 상징적 의미를 강조했다. 경주시장은 경주이씨 종친회장을 만나 이를 논의하고, 그 뜻을 유족 측에 전하기로 했다.

이 회장 소장 미술품 2만3천여 점 기증 뜻 밝히자...여러 지자체가 미술관 유치에 열 올려

경남 의령군도 가만있지 않았다.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의 생가에서 이 회장이 할머니 손에서 자란 인연을 앞세워 미술관 유치에 나섰다. 생가 주변에 호암과 삼성을 붙인 명예도로명을 붙이기로 했다. 이병철 회장이 초등학교에 다녔던 경남 진주시도 미술관 유치에 적극적이다. 전남 여수시 또한 미술관 유치위원회가 구성되어 본격 유치전에 나섰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논리부터가 하나 같이 비이성적이다. 예술이나 문화와 관련한 근거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보기 어렵다. 컬렉터의 기증 정신을 기리고 미술관의 명성을 드높일 방안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안 보인다. 그저 자치단체 간의 실적경쟁으로 치닫는 양상이다. 예술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이 회장과의 사적 인연이나 삼성과의 연고를 들먹이는 게 어이없다. 세계적인 예술품을 갖고 벌이는 연고전(緣故戰)이 볼품사납다.

한바탕 야단법석을 떠는 것은 미술관 건축이 자치단체장의 업적이 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럴싸한 건물을 지어 대대적인 홍보에 나서려는 심산일지 모른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 ‘나 몰라라’ 할까 그게 걱정이다. 이 회장은 미술관에 ‘보존과학’ 관련 부서까지 만들어 첨단기술로 관리하게 했다고 한다. 유치에 나선 지자체들이 이런 사실을 과연 알고나 있는지. 궁금하다.

일단 미술관을 거창하게 지어놓으면 이름값 때문에라도 삼성에서 무언가 도와줄 거라는 기대심리가 발동했을 수 있다. 최소한 관리 비용 정도는 지원받지 않을까 하는 염치없는 기대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 어찌 되었든 세계적인 예술품을 가져다 놓고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컬렉터 기증 정신 기리고 미술관 명성 높이려는 고민 없어...단체장 치적용으로 변질된 양상

능력도 없이 덤비고, 전략도 없이 싸우려는 것 같아 왠지 불안하다. 아무리 훌륭한 계획도 사후관리가 제대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성공하기 힘들다. 실패는 떼놓은 당상이다. 미술관 건축은 소설 쓰기에 비유될 수 있다. 소설에는 전반적인 개념, 플롯, 플롯을 움직이게 하는 창조적 아이디어의 3요소가 필요하다. 그리고 단어 하나하나를, 문장 하나하나를 공들여 써야 한다.

「무기여 잘 있거라」의 마지막 페이지를 서른아홉 번이나 고쳐 쓴 이유를 묻자, 헤밍웨이는 “적합한 단어를 찾기 위해 고쳐 썼을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답변했다. ‘미술관을 관리하는 것’이나 ‘적합한 단어를 찾는 것’이나 중요성 면에서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지극한 정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정부는 이와 반대로 움직이곤 한다. 계획을 세울 때는 의욕적이나 사후관리에는 관심이 덜하다. 예산 관리만 해도 그렇다. 해마다 예산을 세울 때는 갖은 정성을 기울이나, 사후관리는 하는 둥 마는 둥 한다. 소요 시간 차이가 크다. 예산 절차는 연초부터 연말까지 일 년 가까이 걸리나, 결산 업무는 단 며칠 만에 해치우곤 한다. 생색은 커녕 표시도 안 나기 때문이리라.

계획을 세우면서 사후관리까지 고려하면 일 추진이 번거롭고 방해될 수 있다. 일이란 잘 될 거라는 믿음으로 추진해야 하는 터. 잘못되면 어쩌나 지레 걱정하다 보면 의지가 꺾이고 의욕이 떨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무작정 도전에 나섰다간 더 큰 낭패를 당하고 만다. 이번 미술관 선정이 ‘사후관리에 대한 계획은 사전에 관리해야 한다’는 인식이 심어지는 계기가 된다면 그만한 전화위복이 없다. 이 회장의 유지(遺旨)에도 부합되는 일이다.

필자 소개

권의종(iamej5196@naver.com)
- 논설실장
- 부설 금융소비자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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