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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스펀의 충고와 한은 중립성...이주열, 정치권 간섭에 '마이동풍'하라
그린스펀의 충고와 한은 중립성...이주열, 정치권 간섭에 '마이동풍'하라
  • 정종석
  • 승인 2021.04.25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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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당, 4·7 재보궐선거 참패 후 "한은이 돈 안풀어서 선거 졌다"...중앙은행에 책임 돌리는 발언 잇달아
이주열 한은 총재, 앞으로 정치권의 부당한 간섭과 요구에 대해서 “노(No)"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금융소비자뉴스 정종석 대표기자] “마이동풍(馬耳東風·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아니하고 지나쳐 흘려버림)하라.”

이 말은 지난 2018년 ‘세계 경제대통령’으로 불리던 앨런 그린스펀(95) 전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연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으로부터 공격을 받던 제롬 파월 현 연준 의장에게 주던 충고 내용이다.

그린스펀은 재임 중 연예인을 능가하는 스타 대접을 받았다. 시의적절한 통화정책으로 미국 경제를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으로부터 해방시켰다는 호평이 이어졌다. Fed 의장에게 따라붙는 ‘세계의 경제 대통령’이란 수식어도 바로 그린스펀으로부터 유래했다. 세계 경제는 늘 그의 입을 쳐다봤다.

3년 전 트럼프 재임 시절 그린스펀 전 의장은 “나는 18년 6개월 동안 연준에 있었고, 금리를 인하하라는 무수한 메모, 약속, 요청을 받았다”며 “연준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귀마개를 끼고 듣지 않으면 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나는 정치권에서 금리가 너무 낮아서 금리를 올려야한다고 말하는 것을 한 차례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연준은 통화정책과 관련해 대통령 등 외부 정치권의 압력을 무시하고 자신의 업무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글로벌 경기 둔화가 확산되는 가운데 코로나 19까지 겹치는 바람에 중앙은행에 대한 각국 정부의 압박이 한층 거세지고 있다. 세계 여러 국가에서 경기부양을 위한 재정정책을 쓰는 게 여의치 않게 되자 통화정책에 대한 요구가 그만큼 많아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터키,인도 등 후진 독재국가에서 더욱 심각하다. 경기 부진에 직면한 '독재자(strongman)'들은 각국 중앙은행들에 압력을 행사, 금융통화정책의 독립성이 위기를 맞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중앙은행이 흔들리는 것은 글로벌 경기 둔화 속에서 코로나 19로 위기상황이 발생하자 포퓰리즘 득세가 맞물린 탓이다. 선진국과 신흥국을 막론하고 정치권이 이른바 ‘돈을 찍어’ 경기를 부양하려는 심산으로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독립성을 침해하는 상황이 도처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잊을만 하면 반복되는 민주당의 '남탓' 발언 심화...정치권이 과도하게 금융시장에 개입하고 있다는 지적 나와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국은행과 시중은행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나섰다. 지난 4·7 재보궐선거 참패 후 집권당 내부에서 "한은이 돈을 안풀어서 선거 졌다"면서 중앙은행에 책임을 돌리는 발언들이 잇달아 나온 것이다.

잊을만 하면 반복되는 민주당의 '남탓' 발언이 심해지면서 일각에서는 정치권이 과도하게 금융시장에 개입하고 있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윤호중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21일 `상생과 통일 포럼`에서 "위기 극복에는 정부 역할 못지않게 금융 역할이 중요하다"며 한국은행을 강하게 질타했다. 이어 "작년에 8조원 출자하기로 했는데 5분의 1밖에 이행하지 않았다"며 "다른 나라 중앙은행처럼 질적 완화와 포용적 금융을 뒷받침할 때 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앞서 윤 비대위원장은 지난 13일 한 토론회에서도 "다른 중앙은행은 금융·통화정책을 병행해서 재정정책을 쓴다"며 "여당이 주도해서 한은이 금융·통화정책으로 경제회복에 나설 수 있도록 끌어내겠다"고 밝혔다. 이는 여당 내부에서 `한은이 소극적`이라는 기류가 있는 것을 반영한다.

앞서 양경숙 의원도 물가·금융 안정에 고용 안정을 정책목표에 추가하는 한은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민간 금융권을 겨냥한 성토도 쏟아졌다. 윤후덕 국회 기획재정위원장은 "담보 가치만큼 대출해주던 은행에서 정부 방침 때문에 대출할 수 없다고 한다"며 "(유권자들이) 얘기를 듣고 민주당을 심판한 것 같다"고 주장했다. 대출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민심이 악화됐다는 주장이다.

당내 4선 중진인 노웅래 의원은 "한은 기준금리는 0.5%이며 대출금리는 3~4% 정도인데 소상공인·자영업자를 위해 1%포인트는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관치 금융이 아니라 고통 분담"이라고 강조하며 "금융권이 1년에 수십조 원을 벌어들이는데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물론 여기에는 중앙은행의 정책적 실책이 독립성 훼손의 빌미를 줬다는 관측도 있다. 중앙은행이 물가안정 목표에 매몰돼 경제 환경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주요국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극도로 낮췄음에도 글로벌 경제가 인플레이션은 커녕 오히려 경기 둔화를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조화, 중앙은행과 재정당국의 협조가 강조되다 보니 중앙은행의 정치적 중립성이 과거보다 약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이나 집권당이 중앙은행에 간섭하면 한은, 권위주의 정부 시절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 되돌아갈 수도

정치권이 나라와 경제를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방법이 문제다. 경기위축을 걱정하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중앙은행의 정책이 대중영합적이거나 특정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곤란하다는 지적이다.

전임자 트럼프의 실패를 거울 삼으려는 것일까. 최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독립을 보호할 것"이라며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재차 강조하고 나섰다.

바이든은 만일 연준에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얘기한다면 이는 법무부 장관에게 누구를 기소해야 하는지 아니면 하지 않아야 하는지 언급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은행은 지난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숙원이었던 한은 독립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독립을 이루게 된다. 한은의 통화정책 결정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장을 50년 만에 한은 총재가 차지한 것이다.

이전까지 금통위원장은 재무부장관이 맡았다. 한은 스스로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로 자조했던 시절이다. 한은도 기회 있을 때마다 독립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재무부 서슬에 번번이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지금 한은은 중앙은행으로서 막강하고 무서운 힘을 가졌다.

발권력을 가진 중앙은행이 시류에 너무 민감하다면 위험한 일이다. 금리나 돈은 특정 산업이나 지역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고 광범위하게 국민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무서운 위력을 갖고 있다.

금통위 의장인 한은 총재가 자칫 결정을 잘못하면 경제 전체가 결딴날 수도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일본·유럽은 물론 중국 정부마저 수습에 쩔쩔매고 있을 때 각국 중앙은행이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은 이런 배경이 깔려있다.

만일 대통령이나 집권당이 중앙은행의 통화신용정책에 일일이 간섭을 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은이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처럼 재무부의 남대문 출장소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주열 한은 총재는 정치권의 부당한 간섭과 요구에 대해서 앞으로 “노(No)"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앨런 그린스펀의 충고처럼 ‘마이동풍’을 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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