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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은 죽어야 산다“...수퍼부처 재경원의 붕괴와 비만 공기업 LH의 몰락
“공룡은 죽어야 산다“...수퍼부처 재경원의 붕괴와 비만 공기업 LH의 몰락
  • 정종석
  • 승인 2021.03.21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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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 비리’ 사태, 원치 않은 ‘정략결혼’이 빚은 파탄...효율성 제고 위한 조직통합 만이 능사 아니라는 교훈 가르쳐줘

[금융소비자뉴스 정종석 대표기자] 지난 1998년 2월 25일 오후 7시. 정부 과천청사 맨 위쪽에 자리한 1동에서 '재정경제원'의 현판이 철거됐다. 1994년 12월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의 통합으로 탄생한 ‘공룡부처’ 재정경제원이 김대중 정부의 정부조직 개편에 따라 3년 2개월 만에 쓸쓸하게 사라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의 뿌리는 원래 옛 경제기획원(EPB)과 재무부(MOF)이다. 1993년 문민정부로 출범한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두 부처를 전격적으로 통합했다. 주요 정책수단을 한 군데 모아놓으면 효율과 시너지가 높아질 거라는 생각에서다.

이렇게 탄생한 재정경제원은 예산,조세,금융 등 모든 거시정책 수단을 독점한 이른바 ‘공룡부처’였다. 하지만 수퍼부처로 탄생한 재경원은 여타 부처 위에 군림을 했을 뿐, 효율적인 정책집행을 하지 못하고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국제금융 동향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 재경원은 1997년 미증유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막지 못했고, 김대중 정부는 이 거대부처를 해체하고 만다. 부총리급 재경원은 장관급 재경부로 격하(이후 재격상)됐고, 예산과 금융은 신설된 기획예산위원회(이후 기획예산처)와 금융감독위원회로 넘어간다.

이로부터 10년 뒤, 이명박 정부는 재경부와 기획예산처를 다시 통합한다. 물론 정책 효율을 높인다는 취지였다. 대신 ‘작은 정부’에 맞게 격은 장관급으로 떨어뜨렸다. 바로 지금의 수석 경제부처인 기획재정부이다.

현대판 이합집산(離合集散)이라고나 할까.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같은 전통있는 경제부처를 합쳤다가 쪼개고 다시 합치고, 직급을 낮췄다가 높이고 또 낮추고. 그 일만 되풀이하며 어언 27년이 허망하게 흘렀다.

또 하나 비슷한 사례가 있다. 경계가 사라진 주택공사와 토지공사를 합쳐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 건 십수년 전 부터이다. 역대 어느 정부도 해내지 못했던 두 공기업의 통합(토지주택공사·LH)을 이뤄낸 건 2009년 이명박 정부의 ‘공(?)’이었다.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출범 12년 만에 최대 위기에 빠진 LH...애초에는 왜 합치자고 한 것인가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무려 100조원이 넘는 빚을 어떻게 줄여나갈지, 비대해진 권한을 어떻게 통제받으면서 효율적으로 국민을 위해서 행사할지 제대로 정하지 않은 채, 그저 합치기만 했을 뿐이다.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출범 12년 만에 최대 위기에 빠진 가운데 LH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이 드러나고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대표적으로 조직의 몸집이 지나치게 크다는 점이 꼽힌다. 그러다보니 비리를 잉태해 스스로 개혁할 수 없게 되고 이제와서 어떻게 수술할 지도 모르게 돼버렸다.

정부가 LH를 해체 수준으로 환골탈태할 수 있는 혁신안을 추진하겠다면서 LH를 기능 별로 쪼개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둘로 쪼개야 한다는 LH를 애초에는 왜 합치자고 한 것인가.

LH는 원래 한국토지공사(토공)와 대한주택공사(주공) 두 회사를 통합한 것이다. 지금도 전신인 두 회사의 업무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운영한다.

두 기업을 통합하자는 논의는 전두환 정부 시절부터 존재했다. 1980년 말 감사원은 "건설부 산하에 기관이 너무 많고, 업무와 기능이 중복되는 경우가 있어 토지개발공사를 주택공사에 흡수시키는 방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건설부 각 국의 맹렬한 반대로 실현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1983년 4월에는 토지개발공사 직원이 '재벌 토지 재매입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토개공에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통합론이 잠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어 1984년 전두환 정부는 '부동산 투기 억제 종합 대책 내역'을 발표하면서 두 기관을 통합·확대 개편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제시했으나 결국 통합이 성사되지는 못했다.

주공과 토개공의 통합 논의는 김영삼(YS) 정부 시절인 1993년에 다시 나왔다. 기존 통합 논의가 '투기를 억제하고 정부의 주택 정책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였다면, 1990년대부터는 공기업 민영화, 경영 효율화 등의 논거가 등장했다.

다만 YS정부는 통합안은 일단 보류하고, 주공의 택지 개발은 자체 소요로 제한하는 한편 토개공은 도시 재개발 기능을 없애는 기능 조정만 진행했다. 이후 토개공의 명칭은 토공으로 바뀌었다.

기획원과 재무부, 토지공사와 주택공사는 서로 결혼이나 합방을 원치 않아...정치권의 강제 통합이 문제

김대중 정부는 대통령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토공과 주공의 통합을 과제로 내걸었다. 2001년까지 두 회사를 합치겠다고 선언했다. 다만 오히려 통폐합 이후 운영상 문제점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동시에 나왔다. 두 기관 모두 재무구조상 부실 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이어 들어선 노무현 정부도 2003년 공식적으로 통합을 보류하고 만다.

2008년 이명박 정부 들어 주공과 토공을 통합하는 안이 재차 강력하게 추진되기 시작했다. 정부 입장에서는 공기업 통폐합을 통해 구조 조정과 경영 효율화를 꾀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다. 두 공사는 2009년 5월 한국토지주택공사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그해 10월 정식으로 통합됐다.

정부 조직개편의 경우 역대 정권이 나름대로 ‘묘수’를 찾는 과정이었지만, 어떤 조합을 그려봐도 옛 기획원과 재무부 ‘쌍두 체제’를 능가하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전직 관료들은 기획원과 재무부 때는 서로 견제와 균형(check & balance)을 취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끌어왔으나 두 부처가 합쳐지면서 그런 기능은 없어지고 말았다며 지금도 아쉬워한다.

세간에서 개인 간의 결혼도 각자 문제를 먼저 해결한 다음 결혼식을 올려야 원만한 가정이 꾸려지는 법이다. 일종의 ‘정략결혼’이라고나 할까, 1994년 기획원과 재무부의 통합도 당시 세계화 바람에 휩쓸려 YS정부가 내린 특유의 즉흥적, 정치적 결정의 흔적이 적지 않다.

LH의 탄생 또한 MB 정부가 내세운 통합의 주요 이유였던 '구조조정과 효율화'가 무색하게, 조직 비대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세종시와 각종 혁신도시, 국민임대주택과 보금자리주택, 4대강 사업 등 굵직한 국책 개발 사업은 모두 LH의 몫이자 짐이 돼버렸다.

공공 부문 주택ㆍ토지 개발 업무를 사실상 독점하면서 조직은 비대해졌고, 직원들이 실명으로 신도시 땅 투기에 나설 만큼 내부 통제는 무용지물이 됐다.

돌이켜보면 경제기획원이나 재무부, 또 토지공사와 주택공사는 서로 결혼이나 합방을 원치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서로가 원치 않았던 두 조직을 강제 통합하면서 역대 정부의 권력자들이 “산적한 문제들은 스스로 살아가면서 풀라”고 한 것 자제가 애초부터 무리하고 무책임한 일이었던 셈이다.

개혁의 도마 위에 오른 LH의 운명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다. 다만 공룡부처 재경원의 붕괴와 거대 공기업 LH의 몰락은 단순히 효율성 제고를 위한 조직의 통합 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교훈을 가르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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