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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新) 부동산 계급사회의 도래...주거의 신분화가 우리 시대의 망국병
신(新) 부동산 계급사회의 도래...주거의 신분화가 우리 시대의 망국병
  • 권의종
  • 승인 2020.09.05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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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職)보다 집’이 대접받는 부동산 천민자본주의 판쳐...개인주의와 공동체의식 융합하는 선민자본주의 펼칠 때

[권의종의 경제프리즘] 우리의 양반문화는 뿌리가 깊다. 고려시대로까지 소급한다. 신분은 귀족-중류층(향리를 비롯한 하급귀족)-평민-천민의 4단계로 구성된다. 앞의 두 계급이 지배 계층, 뒤의 두 계급은 피지배 계층이다. 조선의 신분 질서는 초기에는 양인-천민의 양천제이다. 중기로 가면서 양반-중인-상민-천민의 4단계 반상제로 분화된다. 이마저 양반 수가 늘면서 해체의 길로 접어든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공명첩 발급, 족보 위조 등으로 반상제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조선 초 전체 인구의 10%에 불과했던 양반 수가 조선말에는 전체 인구의 50%로 늘어난다. 초기 양반은 0.2% 뿐이었으나 조선말에는 90%까지 급증했다는 주장도 있다. 왕족 아닌 성씨가 없고 고관대작 조상을 안 둔 집안이 없었을 정도다. 뼈대 있는 ‘멸치 가문’ 일색이었다.

신분제도는 1895년 갑오개혁으로 공식 폐지된다. 그래도 신분제의 굴레는 벗겨지지 않는다. 천민 출신은 계속 부당한 차별을 당해야 했다. 결혼, 취직 등에서 극심한 제약을 받았다. 이런 풍조는 계급을 인정치 않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진다. 6.25 전쟁으로 신분제는 더욱 쇠락한다. 전쟁으로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마당에 가문이나 출신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제1공화국의 농지개혁법 시행도 신분문화 파괴에 일조한다. 계급사회의 정점에 있던 지주들이 몰락하면서 종속적인 신분구조가 붕괴된다. 이어 60년대 이후 경제개발이 본격화되고, 대규모 인구이동, 소득수준 향상, 출신 불문의 공직 채용이 이루어지면서 그나마 부지되던 신분문화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갑오개혁, 6·25 전쟁 거치며 계급의식 쇠락...지금은 ‘집’이 신분 결정의 새 기준으로 등장

그렇다고 이 땅에서 신분제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신(新)계급제도가 등장했다. 양반제도를 대신해 ‘집’이 신분결정의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어디 사세요?”는 단순히 거주지를 묻는 말이 아니다. 상대의 신분을 확인하는 촌철살인의 뼈있는 질문인 경우가 태반이다. 실제로 거주 지역과 주택 형태에 따라 나뉘는 주거 계급화의 일그러짐 정도가 크고 깊기만 하다.

‘집’은 사람들이 생계를 일궈가는 보금자리만을 뜻하지 않는다. 주거의 개념을 넘어 성공의 상징물로 인식되는 경향이 오히려 크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은 물론 초면인 사람끼리도 상대의 거주지에 유독 관심을 보인다. 강남 지역에 살거나 중대형 아파트에 거주하면 성공자로 여기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자로 낙인찍는 황당한 이분법의 잣대를 서슴없이 들이대곤 한다.

옛날이 좋았다. 1970, 80년대만 해도 중동 건설 현장에서 3년간 땀 흘리면 강남아파트 2채는 장만할 수 있었다. 90년대 말이나 2000년대 초반까지도 내 집 마련의 기회는 열려있었다. 주택청약저축에 가입하거나 조합주택에 가입하면 신규 아파트 분양이 가능했다. 지금은 꿈도 못 꿀 일이다. 평생을 모아도, 대출을 보태도 내 집 마련이 힘들 정도로 집값이 뛰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도, 의사 판검사 등 천하 없는 직업을 가져도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수치가 말한다. 서울의 가구 연 소득 대비 주택가격 비율을 뜻하는 PIR(Price to Income Ratio) 지수가 높아지고 있다. 올해 6월 기준 14.1에 달했다. 3분위, 즉 소득 상위 40%~60%에 속하는 서울 가구가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려면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14.1년이 걸린다는 얘기다. 더 큰 걱정은 근로의욕 저하다. 뼈 빠지게 일해 봤자 집도 못 사는 판에 일할 맛이 날 리 없다. 영혼까지 끌어 모으는 ‘영클’, 빚내 투자하는 ‘빚투’의 동학개미가 늘어나는 이유다.

‘집에 울고, 집에 좌절’하는 지금의 팍팍한 삶...부동산에 저당 잡힌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

‘직(職)보다 집’이 대접받는 세상이다. 하늘같이 높은 장관자리도 집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청와대 다주택 참모들 가운데 전 민정수석 등 일부는 집을 팔지 않은 채 공직을 떠났다. 예전 같으면 상상조차 힘든 일이다. 저간의 사정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청와대 참모들이 자리 대신 주택을 선택하는 일이 벌어졌다. 고위공직자 선임의 인사기준이 집의 숫자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부동산은 불패다. 신화는 계속된다. 집을 매개로 한 부동산 열병은 내 집 마련의 소박한 꿈과 한탕을 노리는 탐욕이 뒤범벅되어 있다. 화려한 부동산 무용담이 도처에 넘쳐난다. 그 이면에는 집에 발목 잡혀 허덕대는 슬픈 사연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젊은이들이 비싼 주택비용으로 출산을 미루거나 결혼을 포기하는 것은 더 이상 뉴스거리도 안 된다. 집에 울고, 집에 좌절한다. 부동산에 저당 잡힌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연이은 정부 대책은 약발은 커녕 역기능과 부작용만 양산한다. 마구잡이 난개발로 환경은 병들어가고 있다. 집을 가진 이도, 집을 갖지 못한 이도 살아가기 팍팍한 게 지금 우리의 삶이다. 소유자는 가중되는 세금에 시달리고 무주택자는 늘어가는 전·월세 부담에 허리가 휜다. 집주인은 매년 정부에 가중되는 세금을 물고, 세입자는 매달 집주인에게 적지않은 월세를 낸다. 모두가 ‘빚진 자’들이다.

주택이 사람 사는 집이 아니라 신분을 사는 곳으로까지 변질된 세태가 어지럽다. 부동산 천민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인간성 회복을 위해서는 경제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윤리적 측면에서의 노력이 긴요하다. 정부는 부동산 가격 등락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다. 정치 사회적인 중심 가치를 부동산 정책에 접목해야 한다. 개인주의와 공동체 의식을 조화롭게 융합하는 따뜻한 선민자본주의를 펼칠 때다. 부동산 신(新)계급주의는 양반문화 만도 못하다. 더 지독한 망국병이다.

필자소개

권의종(iamej5196@naver.com)

- 논설실장

- 부설 금융소비자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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