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규제 천국’ 대한민국...“도움 줄라 말고 간섭이나 마시라”
여전한 ‘규제 천국’ 대한민국...“도움 줄라 말고 간섭이나 마시라”
  • 권의종
  • 승인 2020.02.02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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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주체들이 창의적으로 일 벌이고 문제되는 것만 규제해야...기업들도 규제 가장 싫어해

[권의종의 경제프리즘] 유대교 경전 <토라>에 실린 계율의 수는 613개다. 이 중 ‘하지 마라’가 365개로 일 년의 날과 같다. ‘하라’는 248개로 인간의 뼈와 모든 장기의 수와 같다. 우리가 일 년 내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의 지체를 가지고 열심히 해야 할 것들이 있음을 뜻한다. 토라는 특별히 규제하는 것이 없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규제를 최소화하는 ‘네거티브 시스템’이다. 유대인의 창의성도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토라의 가르침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대한민국은 ‘규제 천국’이다. 정부는 일마다 때마다 규제 개혁을 들먹인다. 말만 요란했지 실적은 미미하다. 오히려 경제활동을 옥죄는 규제가 늘고 있다. 통계가 입증한다. 국무조정실이 운영하는 규제정보포털에 의하면 정부가 입법·행정 예고한 신설·강화 규제 법령안이 한 해 500개를 넘었다. 2016년 317개, 2017년 422개, 2018년 440개, 2019년 505개로 시나브로 늘고 있다. 3년 만에 59.3% 증가했다.

한 개 법안에 여러 규제들이 포함된 것까지 감안하면 지난해 규제 건수는 1,003개로 많아진다. 하루 평균 2.7건의 규제가 쏟아진 셈이다. 95%는 국회 동의 없이 정부 의결만으로 시행할 수 있는 시행령이나 시행규칙 등에 의한 것들이다. 범위 또한 넓다. 산업안전, 금융, 식품, 자동차, 의약품 등 대·중소기업에 관련된 규제와, 반려동물 판매업자, 정원관리사, 유흥업소 운영자 등 소상공인의 활동을 제약하는 규제를 망라한다.

규제 때문에 기업하기가 힘들다. 뭘 하나 해보려 해도 걸리는 게 많다. 이리 가면 이게 걸리고 저리 가면 저게 걸린다. 정부는 이런 실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업이 혁신의 날개를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동원해 규제 개혁에 앞장서겠다고 강조한다. 지난해에는 확대경제장관회의까지 열었다. “정부가 먼저 찾아 나서서 기업 투자의 걸림돌을 해소해줘야 한다”는 대통령의 신신당부가 있었다. 기대가 컸으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작년 '하루 3개꼴'로 쏟아지는 규제...규제로 인한 산업의 비용 부담도 만만치 않아

양(量)만 늘어난 게 아니다. 규제로 인해 산업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한 해 비용이 100억 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규제가 10개였다. 1,000억 원을 초과하는 것도 3개나 되었다. 게다가 상당수 규제가 비용이 과소 추계되었을 것으로 산업계는 의심한다. 신설·강화 규제는 정부 부처가 규제로 인한 비용, 편익 등을 분석하도록 되어있다. 이 정도의 비용 부담이라면 다른 대안을 찾았어야 함에도 정부는 대부분 강행했다.

규제는 투자와 고용을 위축시켜 혁신 성장을 방해한다. 실제로 민간의 경제성장 기여도가 낮아지고 있다. 2018년 1.8%포인트에서 2019년 0.5%포인트로 뚝 떨어졌다. 경제성장율 2.0% 중 정부의 기여도가 1.5%포인트를 차지하고 나머지 0.5%포인트가 민간의 기여도였다. 정부가 성장을 주도하고 민간은 들러리를 서온 셈이다.

규제는 필요하다. 없애는 게 능사는 아니다. 외부 효과가 현저하거나 독점 발생으로 민간 자율로 자원의 최적배분이 이뤄지지 못하는 경우 규제가 가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렇다고 민간의 자유롭고 경쟁력 있는 활동을 심각하게 방해해서도 곤란하다. 경제주체들이 창의적으로 일을 벌이고 그런 가운데 문제가 되는 것만 예외적으로 규제하는 게 맞다.

가령 소비자 보호와 환경 등의 가치를 우선시 하면 규제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반대로 규제를 없애거나 줄이다보면 소비자나 환경 등에 피해를 주게 된다. 이율배반의 상황에서 지혜로운 선택이 이뤄져야 한다. 정부나 국회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기능과 역할이다. 공직에 전문성을 구비한 유능한 인재가 요구되는 이유다.

정부가 전가보도로 내세우는 ‘규제 샌드박스’...까다로운 요건으로 되레 혁신 방해

규제 개혁의 부진이 지적될 때마다 정부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로 내세우는 게 있다. 지난 해부터 시행된 ‘규제 샌드박스’이다. 새로운 제품·서비스에 대해 일정 기간 규제를 면제하고 유예해 주는 제도다. 2020년 경제정책에도 규제 샌드박스의 지속 추진이 포함되어 있다. 산업계의 반응은 의외로 싸늘하다. 대상 사업의 대다수가 까다로운 제약 요건을 붙인 조건부 승인이기 때문이다.

공유경제, 스마트 헬스케어 등 이해관계자가 많은 분야일수록 조건이 더 까다롭다. 특정 공간과 분야에서 마음껏 시도해보라는 제도의 취지가 퇴색되고 있다. 시행 과정에서 이런저런 조건들이 붙다보니 오히려 새로운 족쇄로 작용한다.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이해관계가 첨예한 규제를 풀겠다’는 정부 방침이 기존 사업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쪽으로 결론 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선진국들은 규제 혁신을 통해 성장과 일자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 우리나라는 다르다. 높은 규제 장벽과 이해집단 간 극심한 갈등으로 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는 형국이다. 세계경제포럼(WEF) 평가에서 한국의 국가경쟁력은 141개국 중 13위에 올라있다. 규제 개혁은 이보다 한참 뒤쳐져 있다. 정부 규제가 기업 활동에 초래하는 부담이 87위, 규제 개혁에 관한 법적 구조의 효율성이 67위에 그친다.

기업들도 규제를 가장 싫어한다. 중소기업중앙회가 500개 중소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대상으로 오는 4월 선출될 21대 국회에 바라는 바를 물었다. 전체 응답자의 43.2%, 10명 중 4명 이상이 최우선적으로 추진돼야 할 정책으로 '규제 완화'를 꼽았다. “도움 줄라 말고 간섭이나 말아 달라”는 주문이다. 성가신 부탁이 아니라 간절한 호소로 들린다.

필자 소개

권의종(iamej5196@naver.com)
- 논설실장
- 부설 금융소비자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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