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공화국' 오명 속 갈 길 잃은 소득주도성장
'부채공화국' 오명 속 갈 길 잃은 소득주도성장
  • 정종석
  • 승인 2018.05.29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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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의 늪과 악마의 유혹 사이에서'..가계-기업-국가부채 ‘트리플 악재’ 딜레머

[금융소비자뉴스 정종석 발행인] “기획재정부에서 자꾸 엉뚱한 얘기를 하시는데요. 한국경제는 위기가 이미 왔고요. 이미 회복할 수 없는 단계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책임을 못 느끼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의 핑계를 대니까 답답한 것이죠. 노동자들 해고시키기 전에 기획재정부 관리들 먼저 해고하세요. 그리고 공공기관 평가하는 것처럼 평가하면요, 기획재정부 관리들 다 해고예요. 국민의 이름으로 해고합니다.”

이 발언은 요즘 우리나라 경제가 돌아가는 모습과 비슷하다. 팍팍한 경제현실에 불만을 가진 일부 시민단체나 자영업, 소상공인들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것은 박근혜 정권 3년차인 지난 2015년 9월 당시 민주당 홍종학 의원(현 중소기업벤처부 장관)이 국회에서 최경환 경제부총리를 상대로 대정부질의를 한 내용이다. 홍 의원의 질의는 부채문제로 이어지면서 다시 열변을 토한다.

“지금 부채 보세요. 지난 2년간 박근혜 정부 들어서 가계부채 100조 늘어나고 기업부채 200조 늘어나고 공공부문 100조 늘어나고 나라 거덜낸 거잖아요. 기획재정부가. 이게 무슨 노동자들이 잘못해서 한국경제가 어렵습니까? 나라 이미 거덜났잖아요. 부채공화국 아닙니까?”

재산이 있으면 있는대로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어딜 가도 빚이 문제

박근혜 정부가 탄핵소추와 촛불혁명으로 물러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그러나 부채와 관련한 대한민국의 실상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가계부채, 기업부채, 국가부채가 총체적으로 증가했다.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빚이 문제다. 재산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어디를 가도 빚이 문제다. 가히 부채공화국이다.

이 가운데 가계부채 문제가 정말로 심각하다. 한국경제의 시한폭탄 가계부채가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지난달 은행권 가계대출이 5조원 이상이 늘어 지난해 11월 이후에 최대 증가 폭을 기록했다. 정부가 강력한 부동산 대책을 시행하면서 잠시 주춤한 듯 했으나 다시 꿈틀거리는 것이다.

조만간 나올 가계부채 수치가 마(魔)의 1500조원을 넘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가계부채의 질을 개선하고, 약발이 떨어진 정부대책을 다시 세우지 않으면 나라 전체가 부채의 구렁텅이에 빠질 지도 모른다. 정부가 신 총부채상환비율(DTI) 등을 도입하며 부동산 규제를 강화하자 부동산 관련 대출 수요가 일반 신용대출로 옮겨가는 '풍선 효과'도 눈에 띈다.

전체 가계대출에서 마이너스통장, 신용대출 등이 포함된 기타대출이 역대 최고 수준으로 올랐다. 기타대출은 지난 달에만 7조원대 증가폭을 보였다. 최근 경기가 조금 둔화되면서 저신용자들이 신용대출로 몰리는 측면이 있다, 또한 최근 은행들이 담보대출 규제를 강화하면서 담보대출 수요가 신용대출로 몰리는 특성이 나타난 것이다.

문제는 우리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정책이다. 지난 1분기 가구당 월평균 소득이 4년 만에 최대폭으로 증가했다. 소득 증가가 소득 상위 계층에 집중된 반면 하위층의 소득은 오히려 감소해 소득 격차는 2003년 통계 작성 이래 최고치로 치솟았다. 고용 상황이 악화된 가운데 양극화까지 심화됐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저소득층의 소득을 높여 전체 소비를 늘리고 경제 성장 동력으로 삼는다는 '소득주도 성장'이 무색해졌다.

文 대통령, 집권 2년차 가계소득 감소 등 소득분배 악화는 매우 '아픈' 지점

문재인 대통령이 29일 청와대에서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 경제부처 장관과 정책 관련 참모들이 참석한 가운데 '가계소득동향 점검회의'를 주재하고 현재 경제상황 등을 논의한 것은 이 때문이다. 소득주도성장을 공약했던 대통령으로서는 집권 2년차에 가계소득 감소 등 소득분배 악화는 매우 '아픈'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발간된 `부채의 늪과 악마의 유혹 사이에서`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영국 금융감독청장을 지냈고 이후 금융개혁 방안을 담은 `터너 보고서`를 쓴 아데어 터너 전 영국 금융감독청(FSA) 의장의 저술이다. 터너는 2008년 이후 지금까지 경기가 본질적으로 살아나지 않는 배경에는 `부채`가 있다고 봤다. 부채 때문에 소비 증가가 일어나지 않으며 돈이 부동산으로 몰리면서 양극화가 심화됐다고 적시했다.

10년 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영국 금융시스템 감독을 총괄했던 저자는 무지(無知)의 고백으로 책을 시작한다. 금융시장이 비합리적 과열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위기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위기 이후에도 무너진 은행시스템에 대한 신뢰 회복에 초점을 둔 국제적 개혁을 주도했지만 세계경기는 속절없이 장기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유례없던 금융위기 일선에서 쓰디쓴 실패를 거듭한 저자가 뒤늦게 깨달은 문제의 근원은 바로 부채(신용)였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 선진국 사례 연구와 신용 창출 메커니즘 등에 대한 정교한 분석을 통해 도달한 결론은 금융에서 파생된 실물경제의 과도한 부채비율이 금융시장을 붕괴시킨 것은 물론 경제회복마저 더디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2008년 경제적 재앙은 전적으로 스스로 초래한 것이고 피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 책은 금융시스템에 대한 공적 통제 강화를 해법으로 내놓는다. 저자는 “금융감독은 단지 금융시스템 자체의 안전성 규제를 넘어 실물경제에서 총 민간부채 비율을 통제해야 한다”며 부채 억제를 제언한다. 나아가 “부채는 사라지지 않고 이동할 뿐”이란 통찰을 내놓는다.금융위기 이후 민간부채는 감축됐지만 재정을 동원한 부양책으로 공공부채가 급증한 탓이다.

"천문학적 가계빚 방치할 경우 또 한 번 금융위기 인재(人災) 되풀이할 수도"

우리는 ‘빚’에 휘둘리지 않는다면 분명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아쉽기도 우리를 둘러싼 것은 온통 가계부채, 기업부채, 국가부채 뿐이다. ‘트리플’ 3단 부채의 악재가 한국경제를 날로 압박하고 있다. 그런 만큼 기존에 쌓인 부채를 상각하는 과정이 불가피하다. 저자는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공공부채를 해소해야 한다는 대단히 급진적인 제안을 내놓는다. 이러한 ‘도전적 해법’이 현실화할 수 있을 지는 불확실하다.

세상은 돌고 도는 법일까. 지난해 우리나라 가계부채가 마침내 1,450조원을 돌파했다. 지난 2015년 9월 국회에서 당시 최경환 경제부총리를 상대로 부채문제를 맹렬히 추궁했던 홍종학 의원은 지금은 중소기업벤처부 장관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다. 그때는 야당의원으로서 정부를 맹공하며 비판하면 됐지만 지금은 정부정책을 수행하는 책임장관이다. 홍 의원이 국회에서 과거 자신이 했던 것과 똑같은 질의를 야당의원으로부터 받는다면 과연 어떤 답변을 할지 궁금하다. 다만 우리는 천문학적 가계빚을 방치할 경우 또 한 번의 금융위기라는 인재(人災)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저자의 경고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저자인 아데어 터너 전 영국 금융감독청(FSA) 의장은 2008년 전대미문의 금융위기 당시 영국 금융감독당국 수장이었다. 한국은 지금 사실상 또 다른 경제위기 상태다. 청년실업 대란 속에 양극화와 빈부격차는 어느 정권 때보다 심각하다, 이 가운데 부채문제는 여전히 문재인대통령 경제팀의 뇌리를 짓누르고 있다. 부채문제는 한국경제의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이나 다름이 없다. 빚을 얻어서 하루하루 생활을 하고, 빚을 얻어서 이자를 갚은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예삿 일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부채문제의 전문가이자 선험자인 터너 의장의 경고를 다시 한번 조용히 되씹어 본다.

“재앙이 코앞에 다가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중략) 그리고 2008년 가을에 시장이 무너진 후에도, 이 위기가 얼마나 깊고 또한 얼마나 오래갈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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