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응찬 치매'와 칭병(稱病)
'라응찬 치매'와 칭병(稱病)
  • 최영희 기자
  • 승인 2015.02.08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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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환자가 농심 사외이사 맡아..이제는 법이 징계해야

 
조선시대 선비들은 툭하면 병을 핑계 삼았다. 실록에서 칭병을 검색하면 무려 658개의 기사가 뜬다고 한다. 명종 때 김인후는 사화가 일어날 조짐이 있자 병을 구실로 끝내 벼슬을 사양했다. 칭병은 선비들이 지조를 앞세워 조정을 떠날 때 흔히 둘러대는 구실이었다. 그것은 선비의 소극적인 저항이요, 청명을 보전하는 공인된 수단이었다. 이른바 '칭병사직(稱病 辭職)'이었다.

때로는 병을 핑계 대는 것이 당당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의병장 곽재우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왜적에 빌붙은 공휘겸의 목을 벴고, 전라도로 쳐들어가는 왜군을 길목에서 잘도 막아냈다그러나 의병장 김덕령이 모함에 걸려 비명횡사하자 산속에 들어가 세상을 등졌다직무가 고되고 귀찮아서 칭병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허균도 병을 이유로 중국에 사신으로 가기를 거부한 적이 있다. 이런 허균을 가리켜 광해군은 신하로서 의리가 없다”, “조정을 깔본다고 질책한 뒤 바로 갈아치웠다. 순조 때 어영대장 신대현은 주문모 신부를 효수하라는 명령을 받자 병을 핑계로 미적거리다 파면되었다. 칭병은 직무태만 또는 직무유기의 방편이기도 했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3(부장 이선봉)2010신한 사태당시 불거진 이른바 남산 3억원 의혹과 관련해 라응찬(77)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을 지난 주 피고발인 신분으로 소환 조사했다. 검찰은 라 전 회장을 상대로 비자금을 조성해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 등 정치권에 전달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있는지 등을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신한 사태는 신한은행이 신상훈 전 신한지주 사장과 이백순 전 신한은행장을 배임 및 횡령 혐의로 고소하며 촉발됐다. 이들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라 전 회장의 지시로 3억원이 서울 남산 주차장에서 이 전 의원 측에 전달됐다는 증언도 나왔지만, 라 전 회장은 신한 사태로 인한 충격으로 알츠하이머병(치매)에 걸려 치료받고 있다며 수차례 증인 출석을 거부했다.
 
경제개혁연대는 20132월 라 전 회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지난해 10월에는 참여연대가 신한 사태 당시 자신의 비리 의혹을 감추고 신 전 사장을 몰아내고자 조직적으로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며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 등으로 고발하기도 했다. 또 참여연대는 라 전 회장은 지난해 말 '신한은행 동우회' 송년회에도 참석했다. 참여연대는 라 전 회장이 당시 술 자리에서 참석자들에게 술을 따르게 하는 등 여전히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라 전 회장은 비서나 수행원을 대동하지 않고 자택과 약 10분 거리인 호텔을 에쿠스 승용차로 무난하게 왕복할 정도의 건강상태를 보였다고 한다. 그가 신한사태 당시 알츠하이머 병환을 이유로 증인 출석을 거부한 이후에도 활발할 활동을 이어가면서 일각에서는 '위장 치매'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 2일 농심이 라 전 회장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면서 위장 치매 논란은 다시 한번 불이 붙었다. 이를 두고 참여연대는 "검찰이 '신한사태'와 관련해 고발당한 라 전 회장의 소환조사와 사법처리를 근거 없이 미루고 있다"며 제대로 수사하라고 촉구했다. 라 전 회장은 이번에 농심 사외이사를 맡으려다가 건강 문제와 검찰의 봐주기 논란이 일자 서둘러 자진 사퇴했다.
 
옛날 조정에서는 신병을 빙자해 직무에 태만한 관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한 달에 병결이 3일이면 견책, 5일 이상이면 무조건 해임했다. 신병을 구실로 국정감사를 거부한 것 만으로는 부족해, 아예 병원에 진을 치고 부하들을 수족처럼 부려 가며 억지를 쓰는 고위 공직자가 있다고 한다. 라 전 회장은 이제라도 솔직하게 신한사태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 아울러 자산의 병이 칭병인지 아니면 진짜 치매인지도 세상에 정확하게 알려야 한다. 만약 꾀병이라면 이런 사람들은 죽은 옛 법을 되살려서라도 법의 징계를 해야 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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