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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영천 이씨(永川李氏)-94,491명
(85)영천 이씨(永川李氏)-94,491명
  • 정복규
  • 승인 2014.09.15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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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이씨(永川李氏)는 한문 본관이 다른 또 다른 영천이씨(寧川李氏)가 있다. 전혀 뿌리가 다른 성씨지만 한글 본관이 같아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통계청의 인구 조사에서도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계청의 인구 조사 결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영천이씨(永川李氏)는 1985년에는 총 2,401가구 9,772명, 2000년 조사에서는 총 7,222가구,22,479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반면 영천이씨(寧川李氏)는 1985년에는 총 23,290가구 95,473명, 2000년에는 총 29,559가구,94,491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이 숫자는 문제가 있다. 영천이씨(寧川李氏)는 전북 일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실제로 인구도 그리 많지 않다. 반면 영천이씨(永川李氏)는 전국에 걸쳐있는 성씨이며 실제로 인구도 매우 많고 저명인사도 많은 성씨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인구가 적다. 조사 결과가 잘못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영천이씨(寧川李氏)와 영천이씨(永川李氏)가 뒤바뀌어 발표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필자는 영천이씨(寧川李氏)와 영천이씨(永川李氏)를 서로 바꾸어 글을 실었다. 널리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영천이씨(永川李氏) 시조 이문한(李文漢)은 알천 양산촌의 촌장 알평(경주이씨)의 후손으로 고려 초에 평장사를 지냈다. 영양(永陽, 영천의 다른 이름)군에 봉해진 이대영을 중시조로 하는 파와, 고려 때 영동정(領同正)을 지낸 이 박을 1세조로 하는 파가 있다.

고려조의 대표적인 인물 남곡 이석지는 고려 말에 보문각 대제학, 판도판서를 지냈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새 왕조에 불복, 절의를 지키고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이 되었다. 문한당 이 감은 창왕 때 문과에 장원, 좌헌납을 지냈다. 그는 정몽주가 살해될 때 북청으로 유배되기도 했으며 효성이 자극하여 효자정문이 세워 졌다. 이자용은 우왕조에 판도판서로서 일본에 건너가 왜구의 침입을 금하도록 청했다. 그 뒤 1384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고려가 북원(北元)과 수교하는 사실에 격분한 명나라에 의해 억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조선조 이이응은 1400년 상장군으로 제2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으로 영양군에 봉해졌다. 좌부대언을 거쳐 참지의정부사, 예조판서, 호조판서, 지의정부사, 병조판서를 지냈다. 태종의 척불정책을 도왔고, 1403년 우대언(右代言)으로 계미자주조(癸未字鑄造)에 공이 컸다.

그의 아들 위양공 이순몽은 세종 때 야인 이만주(李滿住)의 토벌에 공을 세우고 판중추원사가 되었으며 뒤에 영중추원사에 올랐다. 이종검은 직제학 이안직의 아들로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 대사간 등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효행이 지극하여 조정에서 호를 효우당(孝友堂)으로 내렸다.

이보홈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 박사를 거쳐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단종 손위 후 순흥(현재 영주)부사로 있으면서 그 곳에 유배된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박천에 유배된 후 순절했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광주(光州)의 대치사와 영천의 송곡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농암 이현보는 영천이씨가 배출한 당대의 명신이며 대표적 학자였다. 그는 현감 이 흠의 아들로서 연산군 4년 문과에 급제하고 정언(正言), 지평 등을 거쳐 여러 고을의 목사, 부사 등을 지냈다. 선정을 베풀어 명망이 높았으며 뒤에 부제학, 호조참판,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청백리에도 녹선되었다. 그는 자연을 노래한 시인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농암가’, ‘춘민곡’등의 시조와 ‘어부가’를 개작했고 ‘농암문집’을 남겼다.

그의 아들 매암 이숙량은 이퇴계 문하의 성리학자로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간재 이덕홍도 이황의 문인으로 주역에 뛰어났다. 중용, 심경(心經), 고문전후집, 가례(家禮) 등을 주석했다.

그는 선조 때 이름난 선비 9명 중 제4위로 뽑혀 영춘현감을 지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로 호종했다.

이 영(李榮)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외직으로 군수, 부사 등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녹선되고, 명종 때 병조참판, 제주목사, 경상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이덕남은 선조 때 무과에 급제, 훈련원부정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의병을 모아 모령(毛嶺)에서 적을 대파하고 기호, 호서지방의 의병들과 함께 활약하다가 전사했다.

영천이씨(永川李氏)의 현대 인물은 이갑상(독립운동가), 이호(내무-법무장관, 대한노인회장), 이기택(민주당총재, 6선의원), 이경식(부총리, 한국은행총재, 경제기획원장관), 이태교(수자원공사사장, 리라정보통신 회장), 이영표(국회의원), 이철(국회의원), 이병숙(의학박사, 서울의대교수), 이 양(공학박사, 서울대교수), 이신수(신학박사, 신부), 이동락(판사), 이병복(극단자유극장대표), 이병호(청와대비서관), 이석헌(화창섬유 대표), 이영식(화흥직물대표), 이원도(군수), 이유기(경찰서장), 이유득(일신토건 사장), 이장표(조선사료공업 사장), 이중삼(군수), 이충락(청송군수), 이한수(변호사), 이해영(의학박사), 이홍규(성주군수), 이활(무역협회장, 경영학박사), 이희대(무임소장관비서관), 이희석(의학박사), 이희우(의학박사, 서전아동구호병원장), 이기화(대광산업 대표이사), 이균식(조원페인트공업 사장), 이인모(문학박사, 고려대교수), 이에리사(체육인), 이혜성(승가대학장, 지장사주지), 이항철(남해화학 재무이사), 이돈환(예림미술고교재단이사장), 이돈만(국회의원), 이두식(남강고교교장), 이부식(공군소장), 이의호(성동경찰서장), 이재기(동광중교장), 이재준(검사), 이선우(동의공업전문대교수), 이기갑(목포대교수), 이태진(영남대교수) 씨 등이 있다. (무순, 전·현직 구분 안 됨)

주요파는 서승공파, 판서공파, 상장군공파, 남곡공파, 영동정공파, 소윤공파, 울산군공파, 감사공파, 소감공파, 생원공파 등이다. 집성촌은 경북 경산시 하양읍 은호리, 경북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경북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경북 안동시 와룡면 산야리, 경북 영덕군 달산면 대지리, 전남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등이다.

본관 영천(永川)은 경상북도 영천시의 지명이다.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도동·임천현을 합하여 영주군(永州郡)이라고 불렀으며 1414년(태종 14) 영천군으로 개칭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영천군이 되었고,1896년에 경상북도 영천군이 되었다.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신녕군(新寧郡)이 영천군으로 폐합되어 영천면을 신설하였다. 1981년에는 영천읍이 시로 분리 승격했고,1995년 영천군을 영천시에 통합하였다. 영천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영천김씨(永川金氏), 영천동씨(永川董氏), 영천박씨(永川朴氏), 영천영씨(永川榮氏), 영천윤씨(永川尹氏), 영천이씨(永川李氏), 영천임씨(永川林氏), 영천정씨(永川鄭氏), 영천최씨(永川崔氏), 영천허씨(永川許氏), 영천황씨(永川黃氏), 영천황보씨(永川皇甫) 등이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156명이 있다. 문과 34명, 무과 25명, 사마시 83명, 역과 6명, 의과 2명, 음양과 1명, 율과 3명, 주학 2명이다. 인구는 1985년에는 95,473명, 2000년에는 116,970명이다. 2000년 인구는 영천이씨(永川李氏)와 영천이씨(寧川李氏)를 합한 것이다. 1985년 당시 서울 16,158명, 부산 10,134명, 대구 16,276명, 인천 1,922명, 경기 5,821명, 강원 2,919명, 충북 1,210명, 충남 1,720명, 전북 2,711명, 전남 4,972명, 경북 22,963명, 경남 8,579명, 제주 88명이다. 2000년 현재는 서울 17,989명, 부산 12,384명, 대구 19,751명, 인천 3,546명, 광주 1,973명, 대전 1,665명, 울산 4,547명, 경기 13,779명, 강원 2,505명, 충북 1,622명, 충남 1,431명, 전북 2,235명, 전남 3,519명, 경북 23,415명, 경남 6,385명, 제주 224명이다. 대구, 경북 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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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정복규 프로필

전북매일 편집국장, 논설위원

● 익산신문 사장

● 현재 새전북신문 수석 논설위원

● 현재 성씨 전문강사(한국의 성씨를 통한 역사탐구)

 ( 저 서 )

한국의 성씨: 성씨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1,2권

• 칼럼집: 숲이 좋으면 새가 날아든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핸드폰이 세상을 지배한다/ 개성있는 인재를 키워라

• 유머집: 각하 코드를 맞추세요

● 핸드폰: 010- 5162- 8632

● 이메일: jungboky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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