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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사와 흑기사...반도건설 권홍사 회장의 차가운 '변신'
백기사와 흑기사...반도건설 권홍사 회장의 차가운 '변신'
  • 김태일 기자
  • 승인 2020.03.24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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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3자 연합 가처분 신청 전부 기각...지분 31.98%→28.78% 내려앉아

[금융소비자뉴스 김태일 기자] 가끔 우리는 ‘백기사(白騎士, white knight)’나 ‘흑기사(黑騎士, black knight)’라는 표현을 접한다. 백기사는 누군가 갈망하는 백마(白馬) 탄 구세주에서 유래했을 터다. 나를 어려운 처지에서 구해주고, 도와 줄 사람을 흔히 백기사라 칭한다.

흑기사는 원래 검은색 갑옷을 두르고 검은 말을 탄 기사를 뜻했다. 중세의 결투재판, 즉 원고와 피고가 싸워 이긴 쪽이 옳다고 결론 짓는 재판에서 피고를 대신해 나서는 사람을 지칭했다고 한다. 원고 대리인은 백기사라고 불렀다. 신화나 전설, 문학작품에도 흑기사·백기사가 더러 등장한다.

이른바 적대적 인수합병(M&A)이 진행될 때는 현 경영진에 힘을 보태는 주주가 백기사다. 2003년 외국계 자본인 소버린이 SK 경영권 인수를 시도했을 당시 방어에 나선 신한·하나·산업은행이 대표적 사례다. 반면 흑기사는 경영권을 뺏으려는 측을 돕는 주주로 부정적인 의미가 떠올라서인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한진그룹의 경영권 분쟁에서 ‘3자 연합’의 한 축인 반도건설이 무너졌다. 반도건설을 비롯해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KCGI가 맺은 3자 연합이 의결권 행사 범위와 관련해 법원에 낸 가처분 신청 2건이 24일 모두 기각됐다. 한진칼 주주총회를 3일 앞둔 시점에서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진영과 3자 연합 간 팽팽히 맞서던 균형이 깨지고 무게 추가 한쪽으로 쏠리는 모양새다.

자본시장법은 주식 보유목적 등을 거짓으로 보고할 경우 발행주식 총수의 5%를 초과하는 부분 중 위반 분의 의결권 행사를 금한다. 이에 따라 투자목적 변경이 보유목적 허위 공시에 해당하면 의결권이 제한될 수 있기 때문에 반도건설이 적극 방어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실패했다. 이번 법원 판결로 오는 27일로 예정된 주총에서 반도건설의 의결권 있는 지분 8.28% 가운데 무려 3.28%가 무용지물이 됐다. 5%만 남았다. 3자 연합 31.98%의 지분이 28.78%로 고꾸라진 셈이다. 한 표가 아쉬운 3자 연합에게 막대한 타격이다. 반대로 조 회장은 승기를 굳히게 됐다.

이로써 조 회장 진영은 37.49% 의결권을 지키게 됐다. 조 회장 및 특수관계인 지분 22.45%와 우호 세력인 델타항공 10.00%, 카카오 1.00%, GS칼텍스 0.25%에 이번 판결로 의결권을 유지하게 된 대한항공 자가보험과 사우회 지분 3.79%가 합쳐진 수치다.

여전히 캐스팅보트 국민연금(2.9%)과 소액주주(30%) 표가 남았지만, 양쪽의 지분 격차가 8.71%p로 대폭 벌어진 만큼 조 회장 측에 유리한 구도로 편성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한진그룹 총수인 조원태(44) 회장과 반도건설 권홍사(76) 회장은 지난해 12월에 만났다. 권 회장은 과거 조 회장의 부친(조양호)과 친분이 있었다. 재계에는 조양호 회장이 과거 사모펀드 KCGI로부터 경영권 공격을 받았을 때 반도건설에 도움을 청했었다는 소문도 있다. 그래서 당시만 해도 권 회장을 조 회장 편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그러나 권홍사 회장은 조원태 회장에게 한진그룹 명예회장직과 한진칼 등기임원·공동감사 선임권, 한진그룹 소유 부동산개발권을 요구했다. 한진그룹 명예회장을 요구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자 권홍사 회장은 경영 참여가 아니라 조원태 회장의 부친(조양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라고 맞섰다.

반도건설 측 해명에도 불구하고 권홍사 회장이 대화가 녹음되었다고 말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반도건설이 실제로 한진그룹에 부동산 개발권 등을 요구했을 가능성이 크다.

애초 백기사로 알려졌던 반도건설은 올해 흑기사로 변신했다. 한진그룹 경영권을 방어하는 백기사로 여겨졌던 반도건설은 지난해 10월 계열사 대호개발 등을 앞세워 한진칼 주식을 사들였다. 당시 한국거래소에 주식 보유 목적을 단순 투자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반도건설은 올해 1월 10일 주식 보유 목적을 돌연 '경영 참여'라고 바꿨다. 한진그룹 경영권을 노리던 사모펀드 KCGI를 위한 흑기사로 변신했다.

월터 스콧이 쓴 '아이반호'에서 영국 존 왕의 전횡에 맞서는 기사 아이반호가 흑기사다. 검은 가면에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스페인 총독의 폭정에 대항하는 쾌걸 조로도 흑기사로 나온다. 성격이 정반대지만 조지 루카스가 영화 '스타워즈'에서 투구와 가스 마스크로 창조해낸 흑기사가 다스베이더다.

백기사도 만만찮다. 프랑스를 구한 잔 다르크, 정의감이 강한 좌충우돌형 인간 돈키호테 역시 백기사로 묘사된다. 그런데 백기사가 흑기사보다 살갑게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 흰색은 밝고 환한 분위기인 데 비해 검은색은 어둡고 칙칙한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일 듯하다. 경제 분야에서 언급되는 흑기사·백기사의 이미지도 비슷해 보인다.

한진그룹 경영권 분쟁과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반도건설 권홍사 회장을 보면서 현대판 백기사와 흑기사로 수시로 변하는 시대활극을 보는 듯하다. 정치에선 어느 날 측근이 원수가 되고, 재벌은 혈육이 원수가 된다. 이제 기업 경영에서도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는 것 같아 씁쓸한 감회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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