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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과 저활성 사회가 남길 숙제들
코로나 사태과 저활성 사회가 남길 숙제들
  • 정근식
  • 승인 2020.03.17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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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식 칼럼]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코로나 사태가 약간씩 진정되고 있다. 그러나 유럽이나 이란, 미국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어서 걱정은 여전하다. 예방, 검사, 확진, 완치 또는 사망으로 이루어지는 감염병 관리 체계에서 우리나라는 짧은 기간에 독특한 패러다임을 구축했다.

예방수칙준수, 검사능력과 실적, 그리고 낮은 치명률 등에서 독보적인 지표를 나타내자 세계의 전문가들은 한국의 정보의 투명성과 관리의 효율성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역 봉쇄와 같은 강권적 조치를 취하지 않아서 인권의 측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역시 공포와 혐오보다는 연대!

이번 코로나 사태는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인종주의적 혐오와 세계 시민적 연대의 길항을 잘 보여준다. 우리의 경우 초기 국면에서는 중국인들이 주로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이들의 입국금지를 일부 보수정치권에서 강하게 요구했지만, 우리 정부는 끝까지 중국인 입국 금지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두 번째 국면에서는 신천지교회의 무언가 숨기는 듯한 행태가 비난의 표적이 되면서 청도 대남병원 정신병동이나 몇몇 요양원들이 방역의 가장 취약한 장소라는 점이 드러났다. 그러나 대구와 경북의 확진자 수 급증으로 병상이 부족한 상황에서 광주가 내민 손길은 일종의 청량제였다. ‘달빛동맹’이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진 병상 나눔 운동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고, 시진핑 주석도 감사의 표시를 전해왔다.

최근 구로 콜센터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한 이후 열악한 작업환경을 가진 노동현장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장소라는 점이 확인되고 있다. 앞으로 수도권에서의 확산 여부가 코로나 사태의 운명을 결정할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아무리 급박한 위기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은폐보다는 투명한 공개가, 혐오보다는 연대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적 가치임에 틀림없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의 통찰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그는 일찍이 수용소와 같은 총체적 제도(total institution)와 집단적 오명에 대한 사회적 원리들을 탐구했고, 일상생활에서의 비대면 상황이나 사람들간의 물리적 거리가 갖는 사회적 의미의 중요성을 밝혔다. 물론 그가 감염병 때문에 마스크를 늘 착용해야 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일상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시대를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고활성 사회에서 저활성 사회로

이번 코로나 사태는 우리의 현대사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지난 70년간 우리 사회를 움직여온 에피스테메(인식론적 틀)는 성장론적 발전사관이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에서 이것은 도전할 수 없는 규범이 되었다. 사회는 항상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으로 상정되었고, 국가가 규정하는 질서를 비판하거나 회의적 시선을 보내면, 그 사람은 따돌림당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어 감방에 가기도 했다.

그러나 1998년 우리는 처음으로 IMF 사태에서 경제가 수축되거나 퇴보할 수도 있다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국난 극복이라는 개념도 등장했지만, 특히 청년들은 국가가 부여하는 규범이 오류일 수도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부터는 민주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정치도 퇴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경제의 영역에서, 두번째는 정치의 영역에서 발전의 신화가 깨졌지만, 사회의 영역은 그나마 신화가 유지되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볼 때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빠르게 움직이며, 어슬렁거리거나 쉬는 것을 싫어하는 사회, 거기에 하나 더 보탠다면, 좁고 빽빽한 환경에서도 잘 견디는 사회였다. 오죽하면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처음 배우는 단어가 ‘빨리빨리’였을까.

나는 이런 특징을 가진 사회를 고활성 사회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제 우리는 코로나 때문에 처음으로 그것과는 반대인 저활성 사회를 경험하고 있다. 생산과 교육의 공간들이 폐쇄되고 생활공간은 개별화되고 있다. 사회가 돌아가는 속도가 느려지고, 사람들간의 상호작용이 축소되는 초유의 경험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럴수록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서비스업 종사자들이나 자영업자들은 견딜 수 없게 된다. 세계적 공황까지는 아니더라고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조치를 정부가 앞장서서 준비해야 한다. 전주시가 시행하기 시작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코로나 긴급재정지원'이 예사롭지 않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필자소개

글쓴이 / 정 근 식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 서울대 전 통일평화연구원장

· 저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국제연대〉(공저, 한울, 2018)
〈평화를 위한 끝없는 도전〉(공저, 북로그컴퍼니, 2018)
〈소련형 대학의 형성과 해체〉(공저, 진인진, 2018)
〈냉전의 섬 금문도의 재탄생〉(공저, 진인진, 2016)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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