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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의 명언, “석유는 악마의 배설물”
알폰소의 명언, “석유는 악마의 배설물”
  • 김수종
  • 승인 2019.04.15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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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종 칼럼] “10년 후 또는 20년 후, 석유가 베네수엘라를 파멸로 몰아갈 것이다. 석유는 악마의 배설물이다.”

누군가 44년 전 위와 같은 말을 했다면, 오늘날 그는 ‘탁월한 선지자(先知者)였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예언한 사람이 있었다. 베네수엘라의 변호사 후안 파블로 페레즈 알폰소(1903-1979)이다. 그는 군부 쿠데타로 얼룩진 베네수엘라에서 민주정부가 출현했을 때 1959년부터 4년간 베네수엘라 정부의 석유장관을 지냈다.

그는 군부 정권 때 미국에 망명생활을 하면서 석유산업에 대한 연구를 하던 중 안정적인 석유가격 보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민주정부 수립으로 석유장관에 임명되자 1960년대 초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장관 압둘라 카리키와 의기투합하여 석유수출국기구를 설립했다. 그는 석유 가격 카르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씨앗을 뿌린 장본인이었다.

그가 정부를 떠난 한참 후인 1973년 석유파동이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고 베네수엘라는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올라앉았다. 재정수입의 400%나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1970년대 베네수엘라 경제는 오일달러 위를 헤엄치는 형국이었다. 당시 베네수엘라를 떠나 미국에서 연구 생활을 하고 있던 알폰소는 1975년 ‘석유 때문에 베네수엘라가 파멸에 이른다.’고 예측하고 “석유는 악마의 배설물”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알폰소의 이런 예측은 베네수엘라의 산업, 역사, 정치문화를 꿰뚫어 보는 그의 통찰력이 산물이었다. 베네수엘라는 주요 농작물의 변천에 따라 ‘코코아 국가’ ‘커피 국가’ ‘설탕 국가’로 불리는 가난한 농업국이었다. 운명이 바뀐 것은 1922년 영국의 엔지니어 조지 레이놀즈가 마라카이보 평원에서 석유 시추에 성공, 하루 10만 배럴이 쏟아지는 대박을 터뜨리면서다.

베네수엘라는 쏟아지는 오일 달러로 일약 남미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제일 높은 되었다. 그러나 오일 달러는 흥청망청 낭비되었고 국민생활을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임금과 물가는 치솟았고 베네수엘라 상품은 국제 경쟁력을 잃었다. 기업가정신, 혁신정신, 국민의 근면성이 모두 파괴되어 버렸다. 민간 부분이 한없이 축소되는 반면, 정부는 석유로 벌어들이는 돈을 갖고 계속 새로운 복지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재정지출을 확대해나갔다.

어느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멍청한 사람만이 세금을 내는 나라”라고 힐난했듯이, 경제는 오일 달러를 갖고 나눠먹는 판이 되었다. 20세기 후반 내내 정치는 쿠데타와 포퓰리즘에 의해 흔들렸고, 여러 정부가 정부 재정지출을 줄이는 정책 시도를 했지만 결국 정권의 붕괴로 끝나고 말았다. 국민이 이미 공짜 심리에서 헤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99년 집권한 차베스 대통령은 그의 대중적 인기와 석유가 상승에 힘입어 사회주의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오일달러를 풀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인기영합의 복지정책, 쿠바 등 남미 좌파 정권과 연합하여 서구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반미정책을 추구했다. 1913년 차베스가 죽자 대통령직을 승계한 니콜라스 마두로가 군부를 장악하고 차베스의 사회주의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마두로 정권은 위기에 직면했다. 국제 유가가 폭락하면서 차베스처럼 복지정책을 펼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제는 추락했고, 야당의 국회를 장악하면서 정치는 크게 흔들렸다. 2018년 인플레가 100만%에 육박했다. 마두로 집권 이후 3000만 명의 인구 중 10%인 3백만 명이 먹고살기 위해 국경을 탈출했다.

2019년 베네수엘라는 경제적 붕괴의 길로 접어들었다. 국제기구들은 올해 예상 인플레이션이 작년 100만%를 훨씬 웃돌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정부가 베네수엘라 제재에 본격 들어갔다. 가장 베네수엘라에게 가장 아픈 제재는 미국이 베네수엘라의 석유에 대해 금수조치를 내린 것이다. 차베스 정권에서도 미국은 베네수엘라 석유를 수입했다. 미국은 또 인도 등 석유소비국에 베네수엘라 석유 수입을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한다. 베네수엘라의 석유생산량은 평소 1일 300만 배럴이었으나 요즘 130만 배럴로 줄어들었고, 연말에는 55만 배럴로 예상된다.

지난 3월 베네수엘라는 5일 동안 전기가 공급되지 않은 최악의 블랙아웃(정전)으로 나라가 마비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수도가 끊겼고 공장이 올스톱되고 계산기를 작동할 수 없어 상점이 문을 닫고 병원이 멈춰 섰다. 수술을 받을 수 없어 환자 40여명이 죽었다.

대정전의 원인은 수력발전이 작동하지 않고 화력 발전기를 돌릴 디젤연료가 바닥났기 때문이다. 마두로 정권은 미국의 전자파 공격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미국의 제재가 베네수엘라 전력공급에 타격을 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처음에 방관하던 미국 정부는 마두로 정권 교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올해 1월 후안 콰이도 국회의장이 임시 대통령임을 선언하고 미국 캐나다는 물론 남미 국가들의 지지를 받으며 마두로 정권에 맞서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대통령이 2명인 이상한 나라가 됐다. 콰이도 국회의장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마두로 대통령은 군부의 지지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자원의 저주인가, 석유가 악마의 배설물이기 때문인가. 인구 3,000만 명, 남한의 9배가 되는 넓은 땅, 사우디보다 많은 세계 최대 석유매장량을 갖고 있는 베네수엘라가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른 이유는 무엇인가.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나가는 국부(國富)의 본성을 알고 이를 통제하지 못하면 어느 나라에게나 닥칠 수 있는 재난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필자소개

김수종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 생활. 환경과 지방 등에 대한 글을 즐겨 씀.
저서로 '0.6도' '다음의 도전적인 실험' 등 3권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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