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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제도와 ‘갑’질의 정치
선거제도와 ‘갑’질의 정치
  • 고세훈
  • 승인 2018.12.18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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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세훈 칼럼] 간디는 자신의 사티아그라하(Satyagraha)-일종의 비폭력 투쟁-가 ‘수동적 저항’ 정도로 해석되는 것을 무척 못마땅해했다. 본래 ‘진리에 굳게 섬’이라는 의미의 이 산스크리트 조어는 무조건적인 평화주의가 아닌, 전쟁수행의 적극적 방법이었다. 결국 그는 인도내전에서 희생됐지만, 그의 주된 정치적 목적은 힌두-슬렘 평화가 아니라 영국지배의 종결이었고, 그 목적은 성취되었다.

2차 대전 직후 영국의 노동당정부가 전격 단행했던 인도의 독립에 간디의 비폭력 투쟁이 과연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다. 가령 신학자 자크 엘룰은 간디의 방식이 만일 영국이 아닌 히틀러의 독일이나 스탈린의 러시아에서 시도되었다면, 간디는 하루아침에 체포돼 죽음을 맞았으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옳건 그르건, 적어도 그는 생각과 말에서 일관되게 정직했고 행동하는데 두려움이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을 평하는데 박하기로 유명한 조지 오웰은, 간디를 다룬 한 서평에서, “성자로 불리는 이들은 죄 없다고 증명될 때까지 늘 죄 있는 자로 간주돼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간디를 본질상 “강압과 기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청정한 향기를 길이 남긴 정치인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간디는 ‘유죄추정’이라는 오웰의 혹독한 기준을 통과한 셈인데, 인간사회에는 무죄판결이 나기 전에도 죄인의 심정으로 살아야 하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늘 있어왔다. 사회경제적 강자들이 대체로 그럴 텐데, 강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은 돈, 권력, 연줄 등 자신을 변론하는데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불비례적으로 많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갑’들에게 ‘심정적으로나마’ 유죄추정의 원칙을 좀 들이대기로서니, ‘을’들로서는 그저 본전치기에 불과할지 모른다.

정치적 대표성 확보는 민주주의의 관건

우리가 민주주의에 그리 목매는 이유도 그것이 약자들을 거드는 데 상대적으로 유용한 정치제도이기 때문이다. 정치마저 약자를 편들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를 전면에 내걸고 부산을 떤다 한들, 그런 정치는 이미 존재할 이유를 잃는다. 민주주의를 부단히 수선하여 대표성을 높이는 일이란, 각자가 역사와 자신에게 책임을 지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선거제도는 정치과정에서 대표성을 확보하는 핵심적 장치다. 소선거구제는 정당득표율과 의석배분 간의 현저한 불비례 가능성을 상존시킨다는 점에서 대표성과 관련하여 치명적인 결함을 지닌 제도다. 그런 결함이 이점이 되는 경우도 있다. 가령 영국의 소선거구제는, 비례대표제를 이모저모 채택하는 대륙국가들과는 달리, 적어도 국내정치에서 극우정치를 배제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워왔다. 예컨대 인종주의적 극우정당으로 분류되는 영국독립당(UKIP)은 비례대표제를 적용하는 유럽의회선거에서는 득표율과 의석수 모두에서 제1당이지만, (소선거구제가 적용되는 국내정치에서는) 2015년 총선의 경우 12.6%의 득표율에도 불구하고 의석은 650석 중 겨우 1석을 얻었고, 지난해 총선에서는 그 1석마저도 잃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에는 소선거구제에 우호적인 이러한 영국적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선 ‘제왕적’이란 수사가 광범위하게 (부정적으로) 먹혀들고 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오랜 권위주의 체제의 경험과 기억은 (승자독식체제가 부추길) 강한 권력에 대한 거부감을 널리 유포시켰다. 더욱이 한국에는 종교, 인종, 언어 등 정체성정치의 토대가 될 만한 체계적 갈등요인이 부재하거니와, 비례대표원리가 대폭 도입된다 해도, 그것이 근본주의적 정치세력의 발호로 이어질 확률은 별로 없다. 지역정당들이 대거 등장할 가능성이 있지만, 한국의 지역주의는 본래적 귀속성에 의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치권에 의해 인위적으로 창출된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정치가 정상화되고 빈부문제 등 본질적 갈등이 누그러지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될 가능성이 크다.

촛불정신이 구두선이 아니라면

남은 것은 소선거구제가 두 거대 보수 정당에 맞설 수 있는 건전한 진보세력을 정치적으로 부당하게 배제한다는 부정적인 면이다. 해법은 선거제도의 비례성을 높이는 일일 텐데, 기득권의 비토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려면, 기존의 지역구 수를 건드리지 않은 채 비례대표의 지분을 늘리는 방법 외에 뾰족한 수가 없다. 영국은 남한 인구보다 불과 1,300만 명 많지만 하원의원 수는 한 세기 넘게 우리 두 배인 650명 내외에서 변함이 없다. 실은 대표성 고양과 더불어 양질의 정치인이 공급된다면, 국회의원 수가 그리 큰 쟁점이 될 이유도 사라질 것이다.

한국 정당체제와 정당조직의 후진성을 탓하며 선거제도개혁의 시기상조를 운운한다면, 이는 한국적 현실을 들어 지방자치를 그리 오랫동안 천연시켰고, 한국적 민주주의를 앞세워 권위주의를 정당화했던 끔찍한 과거를 다시 연상시킨다. 모든 의미 있는 개혁은 불리한 여건에서 시도돼서 서서히 토양을 바꾸어 나갔다. 비례대표의 의의가 확인되고 후보자선출과정의 공개성 투명성이 제고되면 새로운 스펙트럼의 정당체제 또한 점차 자리 잡을 것이다.

좋은 선거제도는 좋은 정치를 위한 기본토양이다. 촛불 운운이 정략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변변한 개혁 하나 없이 지내온 세월이었으니, 촛불정신과 개혁은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했던 것인가. 선거제도개혁은 아홉을 내주더라도 기어코 관철해야 할 개혁과제다. 정치권이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합의했다니, 만시지탄이되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상극처럼 보였던 거대 양당이 지역구예산 확보와 소선거구제 방어라는 일타쌍피를 탐해 느닷없이 ‘협업’을 감행했던 게 불과 엊그제였던 것을 떠올리면, 당장의 정치적 곤궁을 면하려는, 참으로 미덥지 못한 임기응변의 선언적 제스처일지 모른다는 의구심 또한 떨칠 수 없다. 정치마저 ‘갑’질에 나설 거면, 애초에 민주주의는 왜 하자며 그리 법석이었나.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글쓴이 / 고 세 훈
· 고려대 명예교수

· 저서
〈조지 오웰:지식인에 관한 한 보고서〉 (한길사, 2012)
〈영국정치와 국가복지〉 (집문당, 2011)
〈복지국가의 이해:이론과 사례〉(고려대 출판, 2000)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 (후마니타스, 2009)
〈국가와 복지〉 (아연출판사, 2003)
〈영국노동당사〉 (나남, 1999)

· 역서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한길사, 2015)
〈존 메이너드 케인스〉 (후마니타스, 2009)
〈페이비언 사회주의〉 (아카넷,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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