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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약자 배려석의 허실
교통약자 배려석의 허실
  • 임종건
  • 승인 2018.05.21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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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건 칼럼] 대중교통의 교통약자 배려석을 볼 때마다 그 좋은 취지를 십분 이해하면서도 왜 굳이 이런 제도를 운용해야 하는 지에 대한 의구심이 한 켠에 있었습니다. 사회가 각박해지면서 약자에 대한 배려가 소홀해진 세상이지만 이런 방식으로 배려심이 살아날 것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서울 지하철의 경우 각 객차 칸의 두 개 좌석 줄의 양 끝에 세 자리의 교통약자 지정석(경로석)이 있습니다. 또 한쪽 좌석 줄의 가운데 일곱 자리를 교통약자 배려석(환자 어린이동반자 임산부)으로 운용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양쪽 끝의 한 자리씩 두 자리가 임산부 배려석인데, 이 좌석에는 발바닥 좌석바닥 등받이 부분이 핑크빛으로 치장돼 '미래의 주인공을 위해 비워주세요'와 같은 안내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시내버스의 경우 지하철처럼 경로석을 따로 두지 않은 채 앞부분 일곱 자리를 교통약자 배려석으로 운용하고 있는데, 그 중 한 자리를 지하철처럼 핑크빛으로 치장해서 임산부 배려석으로 운용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큰 무리 없이 정착된 것은 지하철의 경로석인 듯하고, 나머지는 유명무실한 배려제도로 여겨집니다. 경로석에서도 과거에는 선 사람과 앉은 사람 사이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나이를 확인하는 일도 있었지만, 대개 외모로 나이의 식별이 가능하고, 표나게 젊은 승객이 앉기를 꺼리기 때문인지 다툼은 덜해진 듯합니다.

경로석을 제외한 나머지 배려석이 배려와는 무관하게 운용되고 있음은 임산부 좌석을 종종 남성이 차지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교복차림의 여학생과 중년 아주머니들이 앉아 있는 경우도 그 자리의 의미를 생각치 않기로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지난 5월 17일자 서울경제신문에서 필자가 평소 궁금해 했던 이 문제를 다룬 기사를 읽었습니다. 지하철과 시내버스에 있는 임산부 배려석 이용실태를 실제 임산부들과 동행해 실험적으로 취재한 르포형식의 기사였습니다.

서울경제신문의 취재진은 임신 11주 된 초기 임산부, 32주 된 만삭 임산부와 동행했습니다. 배가 부른 임산부는 배려석을 찾아가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심지어 경로석의 노인들까지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더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임신 여부가 눈으로 식별되지 않는 초기 임산부에 대한 배려에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임산부 표지를 달았음에도 알아보는 승객은 많지 않았고, ‘제가 임산부인데요’라고 양보를 청해도 선뜻 일어서기보다 입씨름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임산부가 왜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을 탑니까" "그렇게 불편하면 직접 자동차 몰고 다니세요" "양보해줬더니 여자 지정석이 됐나 보네" "배려가 권리인 줄 아나봐" 앉은 승객이 대개 이런 식의 듣기 민망한 말을 임산부를 향해 쏟아내더라는 겁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지하철에서 만삭의 임산부를 보면 남녀노소 없이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이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건강한 시민의식입니다. 환자나 어린이동반자를 보았을 때도 그런 건강한 시민의식이 발휘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것으로, 강요될 성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통약자 배려석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는 측은지심을 제도로 강요하려는 의도로 인해 그것을 북돋우기보다는 오히려 퇴색시킬 우려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더욱이 배려를 받기 위해서 ‘임신 중’이라는 은밀한 사생활을 공개해야 한다면 그것은 임산부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학대입니다. 그 때문에 ‘임산부 배지’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듯하나 기사에서 처럼 착용하는 임산부도 많지 않고, 달아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 실효가 없어 보입니다. 임산부 배려석에 앞서 임산부배지 제도 홍보가 더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렇다고 차내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배려대상자를 위해 지하철 안내방송처럼 자리를 비워 놓게 하는 것은 만원의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고, 좌석의 낭비와 비효율이기도 합니다. 배려석이 배려대상자에 의해 이용되는 경우가 없지는 않겠지만 대부분 무관한 사람들의 차지가 된 배경이라고 봅니다.

서울시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정부 정책은 국가의 의무인 약자에 대한 배려를 표방합니다. 임산부 배려석제도에는 여성보호와 출산장려 목적이 더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거에서 표를 노린 정치적 의도도 숨어 있음을 사람들은 압니다. 그런 전시행정적인 시책일수록 현실에선 겉돌기 마련입니다.

서울경제 기사의 댓글 속엔 이 문제에 대한 처방처럼 들리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배려는 강요나 의무가 아니라 자발적 행동이다. 교육으로 해결할 문제를 선동하고 분위기로 몰아가는 것은 미개국의 행태다”

“평생 탈 일이 없으면서 인심 쓰는 정치인들아! 인심을 쓰려거든 당신 차로 하라”.

#"이 칼럼은 "자유칼럼그룹의 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필자소개

임종건

 

한국일보와 자매지 서울경제신문 편집국의 여러 부에서 기자와 부장을 거친 뒤 서울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사장을 끝으로 퇴임했으며 현재는 일요신문 일요칼럼, 논객닷컴 등의 고정필진으로 활동 중입니다.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및 감사를 역임했습니다. 필명인 드라이펜(DRY PEN)처럼 사실에 바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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