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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란 세트’에 만족하실는지
‘영란 세트’에 만족하실는지
  • 허영섭
  • 승인 2016.08.1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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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섭   이데일리 논설실장. 전경련 근무. 경향신문과 한국일보에서 논설위원 역임. 미국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스쿨 방문연구원.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 '대만, 어디에 있는가', '영원한 도전자 정주영' 등의 저서가 있다.
<허영섭칼럼> 다음 달 28일부터 ‘김영란법’이 시행됨에 따라 정부 청사 주변 식당들이 벌써부터 울상 짓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공무원에게 접대할 수 있는 식사의 한 끼 가격이 3만원으로 제한되면서 매상에 차질을 빚을 것이라는 얘깁니다. 3만원이 넘으면 불법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밥 한 끼 잘못 먹었다가는 접대를 받는 사람이나 접대하는 사람이나 서로 입장이 곤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식사 자리까지 이어지던 민원인들의 관청 접촉이 심리적인 위축으로 이미 뜸해지는 추세라고 합니다. 공무원 접대를 맡았던 기업들에도 비상이 걸렸다는 얘기가 들려옵니다. 언론사나 학교 주변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언론인과 학교 교직원들도 접대 제한 대상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음식점들 가운데 문을 닫은 경우도 없지 않다고 합니다. 김영란법이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이라는 원래 이름답게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3만원짜리 식사라고 하면 일반 샐러리맨들의 입장에서는 모처럼 포식하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점심이라고 해야 보통은 6,000~7,000원짜리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로 한 끼씩 때우고 넘어갈 테니까요. 좀 더 써야 1만원 정도입니다. 저녁에 모처럼 친구들과 둘러앉아 삼겹살을 구우면서 소주잔을 주고받는다고 해도 1인당 3만원이면 충분히 포만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3만원으로 부족하다는 걸 보면 요식업계에도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는 모양입니다.

물론 관청 주변 음식점들이 하소연을 늘어놓는 데도 일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손님들이 다닥다닥 끼어 앉는 뒷골목 음식점과 달리 별도의 방을 제공하기 때문에 ‘자릿값’부터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 더욱이 단골손님 위주로 운영되기 때문에 손님들의 까다로운 식성도 맞춰야 합니다. 음식 이상으로 다른 서비스에도 공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웬만한 한정식집의 식사 가격이 4만~5만원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이유지만 일식집이나 고깃집이라고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몇몇 음식점에서는 이미 3만원 가격에 맞춰 새로운 메뉴를 선보였다고 합니다. 김영란법에 저촉되지 않으면서도 접대 자리에 마주앉은 양측이 서로 부족하지 않게 느낄 만큼 식단을 짰다는 것이지요. 수요가 발생함에 따라 최적의 공급을 창출한 것으로, 재빠른 대응에 감탄할 뿐입니다. 이 메뉴에 ‘영란 세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니, 이름 또한 제격입니다.

이만큼만 해도 일단은 커다란 진전입니다. 음식점들의 입장에서는 매상이 줄어들기 때문에 안된 일이지만 접대에 필요 이상의 돈을 쓰는 사회가 건강할 리는 없습니다. 우리 기업들의 연간 접대비가 10조원에 이른다는 자체가 정상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내 돈이 아니라 회사돈이기 때문에 흥청망청 쓰는 것이고, 그 결과 유흥가마다 밤 늦도록 손님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김영란법의 단속 효과는 비단 음식점 식사값에 그치지 않습니다. 선물과 경조사 봉투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선물은 5만원, 경조사비는 10만원으로 허용 한도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 범위를 넘어서면 부정청탁, 즉 뇌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명절 때마다 정치권 실세나 고위 공직자들에게 선물 꾸러미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배달되고 결혼식 축의금 봉투로 동그라미가 하나 더 붙은 금액이 전달되는 관행에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당장의 부작용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우나 인삼 세트, 고급 과일 등 선물 수요가 그만큼 줄어들게 됨으로써 생산 농가들이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화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가뜩이나 경기가 침체에 빠져 회복 기미가 요원한 상황에서 국가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만만치는 않을 것입니다. 기업들이 접대비 지출을 유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법이 시행되기도 전이지만 제한금액 범위를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도 이러한 부작용을 우려하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경조사비 규제는 그대로 두되 식사접대 허용 상한선은 5만원으로 올리고, 선물비용은 10만원으로 올리자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일부 생산 농가에 도움은 되겠지만 대접받는 풍토를 당연하게 고착시킨다는 부작용을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그보다는 김영란법 시행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잘못된 관행을 바꿔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명절 선물만 해도 과대 포장을 없앤다면 그렇게 비쌀 필요가 없습니다. 백화점이나 유통업자들이 가격을 높이려고 과대 포장을 하기 일쑤입니다. 한정식집에 있어서도 손님들이 젓가락을 대든 안 대든 이것저것 가짓수를 채워 음식을 내놓는 관행을 개선해야 합니다. 지금의 경조사 문화가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도 논의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전반적인 의식의 변화가 따라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식사비와 선물값을 제한하더라도 자기들끼리 몰래 이권청탁을 주고받는다면 제 아무리 김영란법이라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공직사회 일각에서 그런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음을 최근 몇몇 사례에서 분명히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김영란법이 당장은 국민 생활에 불편을 끼칠 소지가 큽니다. 그러나 부정부패의 연결고리를 끊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이 될 것입니다.

#이 칼럼은 '자유칼럼그룹의 '허영섭 동서남북'을 전재한 것입니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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