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규의 新 \\'姓氏의 故鄕\\' 기사 (152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드라마 ‘징비록’ 열풍…웃음 짓는 풍산그룹 류진 회장 드라마 ‘징비록’ 열풍…웃음 짓는 풍산그룹 류진 회장 최근 임진왜란을 그린 KBS 역사드라마 ‘징비록’이 큰 인기몰이를 하는 가운데 류진 풍산그룹 회장이 화제에 오르고 있다. 징비록을 집필한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년)의 후손으로 오랫동안 징비록 유산지키기에 나선 때문이다. 서애는 임진왜란 당시 전시 총사령관 격인 영의정 겸 도제찰사였던 그는 임진왜란 당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정복규의 新 \'姓氏의 故鄕\' | 안규식 상임위원 | 2015-04-28 00:37 (145)나주 김씨(羅州金氏)-46,420명 (145)나주 김씨(羅州金氏)-46,420명 시조 김운발(金雲發)은 신라 경순왕의 둘째 아들인 김굉의 맏아들이다. 김굉은 신라가 망하자 해인사로 들어가 삭발을 하고 법명을 범공(梵空)으로 하여 불가로 귀의했다. 그가 입산하기 전에 고려에서 두 아들을 예우하여 첫째 아들 김운발은 문하시중으로 나주군에 봉하고, 둘째 아들 김우발(金雨發)은 경주군(慶州君)에 봉했다. 그래서 김운발의 후손들이 나주를 본관으 정복규의 新 \'姓氏의 故鄕\' | 정복규 | 2015-02-19 07:17 (150)거창 신씨(居昌愼氏)-43,890명 (150)거창 신씨(居昌愼氏)-43,890명 시조 신수(愼脩)의 선조는 중국 송나라 개봉부 사람이다. 그는 고려 문종때에 우리나라에 귀화했으며 학식이 풍부하고 의술에 능하여 1075년(문종 29)에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 벼슬은 숙종 때 수사공우복야참지정사에 이르렀다. 아들 신안지가 지수주사가 되어 수원 신씨라고 한적도 있었으나 그후에 후손들이 거창에 대대로 살았기 때문에 본관을 거창으로 하였다. 정복규의 新 \'姓氏의 故鄕\' | 정복규 | 2015-02-19 07:17 (149)신천 강씨(信川康氏)-44,259명 시조 강후(康候)는 중국 주나라 무왕의 아우 강숙(康叔-이름이 아니고 시호임)의 둘째 아들이다. 강후는 기원전 198년에 평양에 들어와 왕실을 교화한 공으로 기자(고조선시대 기자조선의 시조)로부터 자신의 아버지 시호인 강숙(康叔)의 강(康)자를 사성 받아 강후(康侯)가 되었다. 그 뒤 고려 명종 때 80세손인 강지연(康之淵)이 신천에 살다가 신성부원군(信城 정복규의 新 \'姓氏의 故鄕\' | 정복규 | 2015-02-19 07:17 (148)양성 이씨(陽城李氏)-44,402명 양성이씨의 시조 이수광(李秀匡)은 중국 송나라 사람이다. 그가 공을 세워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補國)으로 양성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양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시조의 아들 이신정(李臣靖)은 이부상서에 오르고 손자 이원의(李元儀)는 승지, 증손 이영주(李英柱)는 상장군을 역임하였다. 이영주는 또 충렬왕의 딸을 아내로 맞아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으며 더욱 정복규의 新 \'姓氏의 故鄕\' | 정복규 | 2015-02-19 07:17 (147)흥덕 장씨(興德張氏)-44,705명 시조 장 유(張儒)는 상질현(尙質縣-흥성의 옛지명) 출신으로 신라 말에 난을 피하여 중국에 들어가 중국어를 배우고 돌아왔다. 그 뒤 고려가 개국한 후에 귀국하여 광종 때 예빈성에 있으면서 중국 사신의 접대를 맡았다. 그후 벼슬이 광평시랑에 이르렀다.그의 6세손 장기(張機)가 평장사를 역임한 후 흥산(興山-흥성의 별호)군에 봉해지면서 본관을 흥성으로 했다. 정복규의 新 \'姓氏의 故鄕\' | 정복규 | 2015-02-19 07:17 (146)성주 도씨(星州都氏)-46,186명 시조 도순(都順)의 선대는 중국 사람 도계 이다. 그의 후손 도조 가 고구려 때 우리나라에 오면서 도씨가 비롯됐다. 성주가 본관이 된 것은 후손 도진 이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통합에 공을 세워 성산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이다. 성산은 성주의 옛 이름이다. 1세조는 시조 도순 이다. 성주도씨는 성산도씨, 혹은 팔궁도씨 라고도 한다. 팔궁(지금의 칠곡)은 옛날 정복규의 新 \'姓氏의 故鄕\' | 정복규 | 2015-02-19 07:17 (144)안동 김씨(安東金氏)(신파)-47,702명 시조 김선평(金宣平)은 고려 개국공신이다. 그는 신라 말 경애왕 때 고창(안동)의 성주였다.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살해하자 930년(경순왕 4년)에 왕건을 도와 고창(안동)군에서 견훤을 토벌하여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 중의 한 사람이다. 안동 싸움에서 왕건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 바로 정복규의 新 \'姓氏의 故鄕\' | 정복규 | 2015-02-19 07:17 (143)광주 노씨(光州盧氏)-48,574명 시조 노해盧垓)의 선대는 중국 당나라 사람이다. 그는 신라 효성왕 14년 안록산의 난을 피하여 아들 9형제를 데리고 우리나라에 건너와 정착했다. 그리하여 9형제 가운데 노해(盧垓)는 광주, 노오(盧塢)는 교하 등으로 본관이 갈라진다. 노해(盧垓)는 신라에서 광산백(光山伯)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광산(광주)으로 하게 되었다. 그 후 윗대의 계보 정복규의 新 \'姓氏의 故鄕\' | 정복규 | 2015-02-19 07:17 (142)초계 변씨(草溪卞氏)-49,506명 시조 변정실(卞庭實)은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에 오르고 팔계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초계를 본관으로 삼았다. 팔계(八溪)는 초계의 옛 이름이다. 시조의 4세손인 변고적이 밀양에 살면서 그 후손 일부는 밀양을 본관으로 삼았다. 2000년 현재 ▲밀양변씨는 16,911명으로 초계변씨 49,506명에 비해 적은 편이다. 인물로는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 개국공신이 정복규의 新 \'姓氏의 故鄕\' | 정복규 | 2015-02-19 07:17 (141)옥천 조씨(玉川趙氏)-49,847명 시조 조 장(趙璋)은 고려 중엽에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냈다. 조 장과 그의 아들 조홍규, 손자 조 전 등 3대는 순창에 살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순창을 본관으로 했다. 그 뒤 철종 때 순창의 옛 이름인 옥천(玉川)으로 본관을 바꾸었다. 오늘날에도 순창을 본관으로 하는 순창조씨(淳昌趙氏)가 있다. 시조 묘는 전북 순창군 유등면 건곡리에 있다. 순창조씨는 호서 정복규의 新 \'姓氏의 故鄕\' | 정복규 | 2015-02-19 07:17 (140)덕수 이씨(德水李氏)-50,486명 (140)덕수 이씨(德水李氏)-50,486명 시조 이돈수(李敦守)는 고려 중엽 신호위 중랑장(神虎衛 中郞將)의 벼슬을 지냈다. 그의 증손 이윤온이 봉익대부, 밀직사판도판서 등을 지냈으며 덕수부원군에 봉해져서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덕수로 하고 있다. 시조 이돈수의 아들 이양준(李陽俊)은 조산대부(朝散大夫)로 흥위위 보승장군을 역임하고 은청광록대부로 동지추밀원사, 어사대부, 이부상서 등에 추증되었다. 이 정복규의 新 \'姓氏의 故鄕\' | 정복규 | 2015-02-19 06:56 (139)재령 이씨(載寧李氏)-50,940명 시조 이우칭(李禹偁)은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른 뒤 재령군(載寧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재령을 본관으로 삼았다. 이우칭은 경주이씨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의 7세손이다. 경주이씨에서 분관한 것이다. 이 신(李申)은 고려 공민왕 때 사헌부 지평으로 이성계의 추대를 반대하다가 유배 도중 병사했다. 이 오(李午)는 고려가 정복규의 新 \'姓氏의 故鄕\' | 정복규 | 2015-02-19 06:56 (138)수성 최씨(隋城崔氏)-51,780명 시조 최영규(崔永奎)의 본래 성은 최씨가 아니라 김씨다. 경주김씨에서 분적한 안동김씨의 후예로 신라 경순왕 김부의 13세손이다. 그는 고려 원종 때 서경의 학도들에게 학문을 가르쳐 명망이 높았다. 충열왕 때 지금의 수원 일대에 풍속이 퇴폐하고 사람들의 행동이 짐승과 같아 왕이 개탄했다. 이 때 최영규가 자청하여 호장으로 나가 백성을 잘 다스려 윤리, 도덕을 정복규의 新 \'姓氏의 故鄕\' | 정복규 | 2015-02-19 06:56 (137)남원 양씨(南原楊氏)-52,197명 남원에는 ▲남원양씨(南原楊氏)와는 전혀 뿌리가 다른 ▲남원양씨(南原梁氏)가 있다. 양(楊)씨는 한자 속에 나무목(木)이 있다 하여‘목양(木楊)’이라고 한다. 반면 양(梁)씨는 한자 속에 물수(水=삼수변과 같음)가 있어‘물량(梁)’이라고 부른다. 남원양씨(南原楊氏)의 시조 양경문(楊敬文)은 고려 때 지영월군사를 지냈다. 9세손 양이시 가 배출되면서 크게 번창 정복규의 新 \'姓氏의 故鄕\' | 정복규 | 2015-02-19 06:56 (136)순천 김씨(順天金氏)-52,258명 시조 김 총(金摠)은 김알지의 후손으로 825년(신라 헌덕왕 17년)에 태어나 인가별감(引駕別監)으로 공을 세워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다. 평양(平陽)은 순천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순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김 총은 무예에 출중했고 박란봉 장군과 더불어 큰 공을 세웠다. 생존 연대는 신라 말엽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순천김씨의 가승(家乘) 문헌은 정복규의 新 \'姓氏의 故鄕\' | 정복규 | 2015-02-19 06:56 (135)교하 노씨(交河盧氏)-53,203명 시조 노강필(盧康弼)의 선대는 중국 당나라 사람으로 신라 효성왕 때 안록산의 난을 피해 아들 9형제를 데리고 우리나라에 건너와 정착했다. 그 뒤 아들 9형제는 9개 본관으로 갈라진다. 노해는 광주, 노오는 교하, 노지는 풍천, 노구는 장연, 노만은 안동, 노곤은 안강, 노증은 연일, 노판은 평양, 노원은 곡산을 각각 본관으로 삼는다. 노수(盧穗)의 둘째 아 정복규의 新 \'姓氏의 故鄕\' | 정복규 | 2015-02-19 06:56 (134)죽산 박씨(竹山朴氏)-53,489명 시조 박기오(朴奇悟)는 고려 태조 때 삼한벽상공신, 태보삼중대광에 이르렀고, 충정(忠貞)이라 시호되었다. 그는 본래 신라의 종성(宗姓)인 박혁거세의 후예로 경명왕의 넷째 아들 죽성대군의 아들이다. 고려 초에 공을 세워 죽산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죽산은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의 지명이다. 시조의 10세손인 박서 는 고종 때 병마절도사가 되어 몽고군을 함락시켰 정복규의 新 \'姓氏의 故鄕\' | 정복규 | 2015-02-19 06:56 (133)파주 염씨(坡州廉氏)-53,539명 시조 염형명(廉邢明)은 중국 사람으로 신라 때 우리나라에 건너와 지금의 파주에 정착했다. 파주염씨는 처음에는 본관을 시조가 처음에 터를 잡은 봉성(峰城.지금의 파주)으로 하였다. 그 뒤 후손 염제신(廉悌臣)이 고려 공민왕 때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곡성(曲城)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조선 연산군 10년에 서원(瑞原) 지명이 파주로 바뀌면서 정복규의 新 \'姓氏의 故鄕\' | 정복규 | 2015-02-19 06:44 (132)고흥 류씨(高興柳氏)-53,981명 시조 류 영(柳英)은 고려 문종 때 호장을 지냈다. 시조의 7세손 류청신이 고려 충선왕 때 고흥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고흥을 본관으로 삼았다. 시조의 묘는 경기도 개풍군 미륵산에 있으며 향사일은 음력 10월이다. 류청신은 고려 충숙왕 때 임금을 수행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5년 만에 자신이 볼모로 잡히고 대신 임금이 환국하도록 한다. 그 후 9년이 정복규의 新 \'姓氏의 故鄕\' | 정복규 | 2015-02-19 06:44 처음처음12345678다음다음끝끝